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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주 May 19. 2022

밀라노가 사랑한 군종신부

밀라노에서 온 편지


                                      “ 주님, 당신은 이미 저의 두 자녀를 데려 가셨습니다.

저는 마지막 자녀를 봉헌 할 것이며, 그를 축복해주신다면, 언제나 당신을 위해 살도록 할 것입니다. ”

                                              - 복자 돈 뇨끼 Don Carlo Gnocchi의 어머니 클레멘티나의 기도 중에 -



 유능한 안과 의사였던 체사레 Cesare Galeazzi는 1956년 2월에 자신을 찾는 뇨끼 신부의 전화를 잊을 수 없었다. 당시 뇨끼 신부는 54세로 무서운 병마와 싸우는 중이었다. 채석장 노동자로 일했던 그의 아버지는 일찍이 직업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첫째와 둘째 형도 어릴 때 결핵으로 하느님 곁에 성급히 가야만 했다. 막내 아들은 분명 어머니의 신앙심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다니던 성당에서 밀라노 교구 신학생으로 추천되었을 것이다. 사제가 된 후, 처음 몇몇 성당에서 청년들의 교육을 담당했던 뇨끼 신부는1930년대 말, 대학교의 학군단을 지도하는 소임을 맡게 된다. 이탈리아 북부 도시 밀라노는 알프스 산맥을 중심으로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과 인접해 있어 국경 수호가 그 어느때보다 중요했는데, 산악특수부대인 ‘알피니Alpini’가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복자 뇨끼 신부가 설립한 밀라노의 재활병원

 

 의사 체사레는, 뇨끼 신부가 입원하고 있는 콜럼버스 병원으로 향하면서 알피니의 군종신부로서 그가 복무 했던 모습을 잠시 회상했을 지 모른다. 많은 학생들이 참전해야만 했던 제 2 차 세계대전, 뇨끼 신부 또한 입대하여 학생들과 함께 그리스부터 러시아 전선까지 가게 된다. 그는 러시아 전선에서 후퇴하는 젊은 군인들의 비참한 상황에 대하여 종종 묘사하고는 했는데 추위와 배고픔으로 수 천명의 병사들이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고 전했다. 차가운 러시아 전장에서 얼어 붙은 포도주와 제병으로 미사를 집전해야 했던 젊은 사제가, 자신도 답 할 수 없는 죽음의 허탈함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을까. 뇨끼 신부는 고통 중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시기 절실하기 뵙고자 하였다고 했다.


복자 돈 뇨끼가 사용하던 군용품들


 때때로 의사 체사레는 뇨끼 신부에게 한 가지 의문을 줄곧 품었을 지 모른다. 러시아에서 돌아와 평화로이 쉴 수 있었던 그가, 대체 왜 그랬을까? 북부 알프스 산맥 일대를 돌며 도피하는 유태인들과 적군의 부상자들을 돕다가 당국에 의해 긴급체포를 당하는 행위가 과연 최선이었을까. 어쩌면… 인간존재의 구분에 앞서 하느님이 주신 생명은 모두 같다는 인식이 깊게 들었을 수도. 그래서 전쟁 후에 그가 세운 상처받은 약자들을 위한 재활 센터의 표어가 ‘언제나 생명 가까이에! Accanto alla vita, sempre!’인 것도 이러한 연유였을 지 모른다. 

이제 54년 간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달릴 길을 다 달린 그가, 지금 안과 의사인 자신을 애타고 찾고 있다. 뇨끼 신부는 이미 일 년 전에 자신을 만나 유언처럼 말했었다.                                                        


" 제가 죽으면 두 눈을 아이들에게 주었으면 합니다. 이제 제 눈만 남았습니다. 이것도 삶을 회복할 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


 과연 인간은 어디까지 존재에 해당하는 조건들을 포기 할 수 있을까. 그 이유가 ‘신’이든 ‘사랑’이든 ‘헌신’이든 간에, 존재가 사라질 위기에도 온전히 그럴 수 있을까. 나는 궁금했다. 


              그가 착한 목자였기에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그런 선택을 했기에 착한 목자가 된 걸까. 


복자 뇨끼 신부의 두 눈을 이식받은 소녀와 소년


 체사레는 그날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었다. : 내가 뇨끼 신부를 보았을 때, 침대에 누워있던 그는 창백하였고, 아름다운 손은 백지 상태였다. 그가 내게 말했다. “ 체사레 씨, 나는 당신에게 큰 호의를 청합니다. 그것을 거절하시면 안됩니다. 몇 시간 안에 나는 사라질 것입니다. 내 각막으로 아이들의 시력이 회복된다면, 너무 행복 할 것입니다. …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  그는 어머니가 주신 십자가에 입을 맞추며 숨을 거두었다. 

어머니에게 받은 복자 돈 뇨끼의 십자가

하지만 아름다운 사제의 마지막 모습에 체사레가 감동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서둘러 뇨끼 신부의 마지막 꿈을 이루기 위해 두 아이의 각막이식 수술을 스위스에서 비밀리에 진행해야만 했다. 1950년대는 장기기증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부족했던 때라 수술 자체가 큰 용기를 필요로 했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경찰의 체포를 감수해야만 했다. 이미 체사레는 ‘수술 칼을 쥔 선교자’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가 뇨끼 신부의 파란 두 눈을 수술대에서 내려다 보았을 때, 법적인 위험보다 그의 사랑을 어떻게 전해야 할 지 그 사명감이 더 컸을 것이다.

사람이 사랑을 알게 되고 사랑을 시작하면, 새로운 용기와 기적이 생기듯, 의료진은 무사히 두 아이의 각막이식 수술을 성공리에 마친다. 천국에서 복자 뇨끼 신부의 기도 또한 함께했을 것이다.  결국 시대를 앞서갔던 그의 각막이식 수술로 인해 사회적으로 장기기증에 대한 관심이 커질 수 있었다.




 불행한 이들을 만났을 때, 사슴처럼 큰 눈으로 유난히 활짝 웃어 보이던 사람. 복자 카를로 뇨끼 신부. 얼마나 덜어내고 비워야 그와 같은 마음이 될 수 있을까. 회복이 절실한 이들 안에 계신 주님을 먼저 그가 뵈었기에 그럴 수 있지 않았을까. 그 분을 만나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사랑을 알면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신앙의 신비. 그것이 이와 같은 사랑의 비밀일 것이다.  



복자 돈 뇨끼를 기념하는 성당에 위차한 제단의 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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