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지혜 Jun 19. 2019

회사원과 술자리

회식이 업무의 연장이면 초과근무 수당을 주세요

처음 이 회사에 면접을 보러 왔을 때 나의 상사가 될 사람은 나에게 술을 잘 마시냐고 물었다.

나는 술을 잘 마시는지는 모르겠으나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그게 문제가 될 줄을 꿈에도 몰랐다.     

 

입사를 하고 어느 날 상사는 나에게 왜 자기랑 술을 안 마시냐고 물었다.

내가 왜 상사와 술을 마셔야 하는지 정말 몰랐던 나는 직선적으로 물어봤다.

본래 돌려서 말하는 스타일이 못된다.     


“왜 제가 상사님과 술을 마셔요?”     


그랬더니 상사가 대답했다.      


“면접 때 술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리고 나는 또다시 물었다.


“그런데 제가 왜 상사님과 술을 마셔야 해요?”     


그리고 상사는 이렇게 대답했고.


“친해지고 싶어서”    

 

술을 마시지 않아도 친해질 수 있다고 둘러댔지만 정말 어이가 없었다.

내가 술을 좋아한다는 게 왜 당신과 술을 마시겠다는 의미로 해석이 된 걸까.

나의 언어에 문제가 있었나 면접의 순간으로 기억을 되돌려 보기도 했다.             


그 이후에도 몇 번 같이 술을 마시자고 졸랐다. 이건 정말 졸랐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 만큼이었다.

우리 회사는 층마다 부서가 다른데 우리 팀과 다른 팀이 함께 쓰는 사무실에 여자는 오로지 나뿐이다.

사실 그동안 여자들과 알게 모르게 정치 아닌 정치를 하며 일을 했던 것에 피곤함을 느꼈던 나는,

차라리 남자들만 있는 이 사무실이 좋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 일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남자들만 있다 보니 괜한 말이 나올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고 술은 좋은 사람들과 마시고 싶다.

굳이 회식도 아닌 회사의 사적인 술자리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

회사 사내 익명 게시판에 글을 올릴까, 인사팀에 면담 신청을 해 공개적으로 이야기를 할까 생각하다가

또 괜히 일을 크게 키우고 싶지 않아서 그날 밤 퇴근길에 상사에게 없는 남자 친구를 만들어 카톡을 보냈다.


남자들만 있는 팀이라 그렇지 않아도 남자 친구가 걱정이 많다고. 괜한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고.

그리고 남자 친구는 사적인 부분이니 소문이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혹시 그 상사가 나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상사는 유부남이다)


이 일은 이렇게 끝이 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다음 날 팀장급 회의에 들어갔던 그 상사는 우리 팀에 전체 공지를 했다.

강요하는 것은 아니나 다음 주에 다른팀과 회식이 있으니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얘기하라고.

그 다른팀은 여성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무언가 꺼림칙한 의도가 보였던 나는 친구에게 물어봤고 친구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내가 남자 직원들과의 술자리가 불편하다 했으니 여자 직원들을 데리고 온 거라고.

그런데도 네가 술자리에 안 올 거야?라는 의도.

정말 그런 의도로 회식을 잡아온 거라면 상사는 틀렸다. 나는 가지 않을 거고 가지 않겠다고 말했으니까.


나의 첫 파리 여행의 숙소 주인 언니는 지금의 내 나이와 비슷했다.

장기간 조용히 머물다간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 나이쯤 되면 어떤 사람인지 보이더라고. 그런데 너는 참 괜찮은 사람 같다고.

장기로 머물다 보면 아주 사소한 거라도 요구하기 마련이고

너는 우리 집에서 아팠기 때문에 클레임을 걸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서울에 가면 꼭 보자고.


언니의 그 이야기를 나는 요즘에 참 많이 느낀다.

언니가 숙소를 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사람에 대해 깨우쳤듯이

나도 방송을 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사람에 대해 조금은 깨우친 게 있었으니까.

그래서 사람의 의도가 보이고 몇 마디 나눠보면 그 사람의 성향을 대충은 파악할 수 있다.

물론 나의 프레임에 가둬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이 사람이 내 과인지, 아닌 지정도는 파악이 된다.


어쨌든, 나는 회사 사람들과 사적인 친분을 나누고 싶지 않다.

그저 일에 지장이 없을 정도의 친절함을 유지하고 사무실 밖으로 나오면 그냥 모르는 사람이고 싶다.

회사에 일을 하러 온 것이지 친구를 만들고 싶어 온 게 아니니까.


물론, 방송을 하던 시절엔 작가들과 사적으로도 친하게 지냈고 지금도 연락을 하고 만나기도 한다.

그때 우린 같은 처지였고 방송의 부조리가 온통 작가에게만 쏠리는 것에 분노했으며

어느 하루도 평범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일주일을 밤을 새도 할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런데 여긴 방송이 아니고 회사니까.

내가 방송의 낭만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사각형의 건물과 사각형의 사무실과

사각형의 책상 속에 갇힌 곳이니까. 노동법아래 주 40시간을 일하는 곳이니까.


무엇보다 나는 정말 일이 하고 싶어 이 회사에 들어왔고 이 회사에서 이 일은 나밖에 할 수 없으므로

딱히 누군가와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어려운데 내가 왜 사적인 술자리에 참여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내가 원하지 않는데 강요를 하는 술자리라면 더더욱 거절을 하고 싶다.


그 이후로 사적인 술자리 문제는 잠정 해결이 된 듯하다.

그리고 그 상사는 나에게 삐졌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삐진게 확실하다.


참고로 이야기하자면,

상시 근로자 10명 이상인 모든 기업을 대상으로 올해 7월 16일부터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된다.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ㆍ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에 /직장에서 술자리를 강요/하는 것도 포함된다.


회사의 회식이나 술자리가 업무의 연장이라고 생각한다면 초과근무 수당을 줬으면 좋겠다.

회사 돈으로 공짜로 술을 마시고 맛있는것을 먹지 않냐고 말한다면 그러니까 안 마시겠다고.

내 돈 주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마실 테니까 그 돈 넣어두시라고.

또 이런 게 사회생활이라고 말하고 싶다면 사적인 술자리를 갖지 않아도 그동안 사회생활을 잘해 왔으니

내 사회생활 걱정까진 안하셔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