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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지윤 Jul 12. 2020

자전거를 성공적으로 타는 방법

저전거 타기를 성공한후 인생을 실패하는 법을 알았다.

내가 처음 자전거를 배운 것은 내 나이의 앞자리 수가 2로 바뀐 직후였다. 운전면허보다 자전거를 늦게 배운 셈이었다.

세발자전거를 뗀 후 나는 보조바퀴가 달린 자전거를 탔어여만 했다. 이유는 넘어지는 것이 무서워서였고 넘어져 다치는 것이 두려워 보조바퀴를 뗀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나갈 엄두 조차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롤러스케이트 조차 집 마당에서야 겨우 천천히 타는 정도였고 그나마도 언덕을 쭈그리고 앉아 내려갔던 나의 모습은 매우 루저스러웠다.


어쩌면 나는 상처를 거부하는 아이로 자라왔는지 모르겠다.

그네조차 높고 멀리 타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본능적으로 위험을 거부했던 탓인지 나는 잔병 한번 없었고 어디 한 군데 부러지거나 찢어진 곳이 없었고 심지어 넘어져 무릎 한번 깨져보지 않았다.

내 몸 어느 한구석 어느 기억, 흔적, 추억 따위의 상처 자국은 존재하지 않았다.


스무 살 언저리 미국의 친척집 차고에서 어른의 자전거를 발견했다.

그날 그 차고에 오래 방치되어 있던 자전거를 보는 순간 왜 그랬는지 지금, 당장 그걸 밖으로 끌고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운하우스 뒤로 넓고 인적이 드문 공원이 있었다. 나는 무작정 난생처음 보는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자전거를 끌고 공원으로 갔다.


보통 처음 자전거를 배웠다, 라는 문장을 보고 떠올리는 이미지는 아직 키가 다 자라지 않은 나이에 아빠나 엄마 손에 잡힌 자전거를 머리와 온몸에 보호장치를 하고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어린 아일 테지만 나의 처음 자전거를 배웠다, 라는 문장에는 키가 클 대로 다 커 이미 상장판이 닫혀버린 성인 여자가 놓였다. 두려움을 알아버린, 실패를 저항할 나이였다.


그 성인 여자가 처음 혼자 자전거에 몸을 실었다. 자전거는 심지어 남자용이었는지 몸체와 바퀴가 심하게 컸다. 중심을 잡기조차 힘이 들었지만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데만 하루를 허비했다. 온몸에 힘을 주었고 제 속도로 나가려는 바퀴를 저지하며 매 순간 긴장을 주었다. 그렇게 아침부터 밤까지를 허비하고 마침내 자전거를 타고 그 넓은 서클을 휭휭 돌고 있었다.


마침내 나도 자전거를 탈 수 있다, 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온 것이다.

그리고 자전거를 혼자 스스로 배우는 동안 단 한 번도 넘어지지 않았다. 성공 (했다고 착각)한 것이다.


이 바보스러운 문장이 그때 당시에는 자랑스러웠다.

시간이 지나 내가 얼마나 멍청한 루저인가를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다음날 나는 온몸에 알이배겨 일주일은 자전거는커녕 집 계단도 오르내리지 못했고 후덜거리는 팔로 숟가락 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다.


훗날 단 한번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타는 법을 배웠다는것은 자랑도 진짜 자전거를 타는법을 배운것도 아니라는걸 알게 되었다.


무릎이 까지거나 팔꿈치가 쓸리거나 멍자국 없이 자전거에 흠한번 내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혼자 달리게 되었으나 내 몸은 온몸으로 넘어지는것을 거부하기위해 경직되었고 일주일을 알이 배긴채로 살아야 했을때 내가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 위험을 맞닥드리거나 굴곡을 넘어야 할때 제대로 넘어지는 법도 다시 얼어서 달리는법도 두려움에 저항하는 힘도 그 무엇도 얻지 못 했다는것을 깨달았다.


나는 자전거를 혹은 그것을 타고 달리는 법을, 그 과정에 놓일 무수한 일들을 하나도 알지 못한채 그저 나도 이제 자전거를 탈줄 안다 라는 짧고 무의미한 말에 같혀버린 것이다.


그것은 인생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삶과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것이 두려워 늘 전전긍긍했다.

내 인생에 성공이라는 단어가 실패보다 더 만연했다면 그것은 내가 깨지고 부서져 가며 성공을 쟁취한것이 아니라 실패할 확률이 적은곳에 도전을 했음이고 실패하지 않을 비겁함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자전거 타는법을 배우면서 한번도 넘어지지 않은것, 넘어지지 않기위해 안간힘을 썼던것처럼 말이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분쟁과 논쟁을 피하는일에 매 순간을 매진했다. 관계 역시 내가 참으면 내가 버티면 그저 평지에서 매끄럽게 굴러 나가는 자전거 바퀴처럼 위험하지 않고 안전하게 굴러갔다.

역시나 그런 관계는 생각지도 못한 굴곡이나 어려움에 맞닥뜨렸을 때 대처할 새 없이 고꾸라 지고 말았다. 넘어지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배운 자건처처럼 관계에서도 잘 넘어지고 잘 일어나고 위기를 넘기는 법을 몰라 허둥댔다.


나는 넘어지면 일어나는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넘어지는것을, 깨지고 부서지는 내 모습을 창피해하고 타인의 평가와 시선이 두려웠던 나는 언제나 우아하고 흠이 없고 싶었다. 우아하고 흠이 없는 삶이 제대로 삶을 사는것이라고 잘못 인식한 탓이다.


이나이 먹도록 Fail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살아온것이 내 인생의 최대 Fail이라는걸 이제야 알아간다. 성장판이 닫히고 난 후 단한번 넘어지지 않고 스스로 배운, 아니 배웠다고 착각한 자전거를 타는법처럼 실패와 상처와 넘어짐 없이 배운 인생은 되려 불안정했다.


인생은 타운하우스 뒤의 잘 닦여진 공원처럼 평평하고 한적하며 안전하지만은 않은것이기 때문이다.

진짜 인생은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시의 한 가운데일 수도 있고 험난한 언덕과 내리막이 예고도 없이 반복되는 산악일수 있으며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사람과 갑작스럽게 마주치는 코너가 즐비한 곳이기 때문이다.


너와 나의 다름을 인식하고 맞춰 가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수없이 깨지고 부서지고 마모되기를 반복해야 했으나 나는 부딪히지 않으려 노력했다.

다치지 않고 상처받지 않는것이 관계의 미덕이라고 착각했던 우리의 최후는 흠한번 내보지 못한체 변하지 않는 나를 그대로 가지고 서로 멀어지는 것뿐이었다.


나는 지금, 이제와서 넘어지고 꼬꾸라 지는 법을 배우려 한다.

넘어지고 엎어지는 것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 후에 오는 상처에 대처하는 법을 알아가는 중이다.

넘어지면 아픔을 무릎스고 일어나야만 하는것이 아니라 넘어진김에 엉덩이를 퍼지르고 앉아 쉰다거나 넘어진김에 가까워진 땅바닥에 피어오른 들꽃들을 들여다보는 일탈 따위의 진짜 방법을 찾아가는 중이다. 고꾸라 지지 않았다면 보이지 않았을 들꽃을 바라보는 일에도 의미는 있으니.


꼭 넘어졌다고해서 실패했다고해서 아픔을 무릅쓰고 일어나 어그적 거리는 뼈로 다시 자전거를 몰고 나갈 필요가 없다는것도 알았다. 넘어진김에 땅바닥에 누워 낮잠이라도 한잠 자고 하늘이라도 한번 쳐다보는 여유. 우리가 살면서 알아야할 실패와 상처에 대처하는 진자 방법이 어쩌면 그런것인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런 깨달음은 성장판이 닫힌 여자가 실패한번 없이 배운 자전거 타는법에 성공했으므로 알아낸것이다. 더 어렸다면 그저 무작정 기를쓰고 일어나야만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날씨가 좋아진 요즘 주말 아침이면 고가의 자전거를 타고 장비까지 갖춰 라이딩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인다. 주말 아침 아직 다 깨어나지도 못한 몸을 겨우 일으켜 베이글이나 사러 도로위에 얹어져 있는 나와는 누가봐도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다.


역시나 고가의 자전거를 보유한 친구가 나에게 함께 자전거타기를 권했다.

어머, 나에게 그런 험하고 무시무시한 운동을 권하다니 나는 화들짝 놀란다. 몸에 쫙 달라붙는 바이크웨어를 입고 헬멧과 장갑을 끼고 고가의 자전거를 몰고 도로위에 올려져 라이딩을 하고있는 나를 상상해 보았다. 트레이닝 복을 간신히 꿰어 입고 흐트러진 몰골로 베이글을 들고 겨우 졸음이나 이기며 도로위에 얹어진 나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심지어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낡은 자전거를 단한번 넘어져 보지 않겠다며 몸에 힘을 주고 겨우 배운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가르쳐 줄테니 함께 자전거를 타자고 했다. 그 위험한 자전거를 내가 과연 탈 수 있을까? 흠집한군데 없는 몸과 고가의 자전거에 상처를 주지 않겠다고 힘겹게 버티는 내가 떠올랐다. 힘겹게 버티는게 아니라 즐겁게 버려야 했다. 나를 몸을 인생을 그리고 고가이기는 하지만 소모품일 뿐인 자전거를 말이다.


주말 아침 잠을 이기고 도로를 달리는 자전거인들의 모습은 나를 더욱더 루저로 만들었다. 저들은 차가 생생달리는 도로도 겁내하지 않았고 오르막과 내리막이 예고도 없이 나오는 돌길도 두렵지 않아 보였다. 그들도 처음이 있었겠지. 넘어지고 까지도 부러진 그들의 상처와 흔적이 주말 아침잠을 이기고 나와 세상 무엇도 두려움 없이 즐기는 그들을 만들었다. 그들의 성공은 나의 성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수없는 실패 넘어짐 Fail들이 만들어낸 성공이야 말로 낡은 저전거로 한번의 넘어짐 없이 사람없는 공원이나 한바퀴 돌고는 자전거 타기를 성공했다 (고 착각하는)는 루저와 진짜 위너를 단박에 가려낸다.


내 자전거 타기의 성공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실패였다.

루저처럼 성공한것이다. 내가 바보처럼 실수하고 넘어졌다고 생각하는 모든 순간들이 실은 미래의 어느날 나를 진짜 위너로 만든다는 걸 자전거를 배우며 알았다. 그 매번의 실패와 넘어짐과 두려움을 극복한 자만이 도로위의 차들도 굴곡진 돌밭도 이기고 삶을 즐기는 사람이 된다는 걸 말이다. 실패가 바로 성공의 키였구나.


나는 오늘 다시 자전거타는 법을 배우기로 했다.

예쁜 바스켓이 달린 민트그린 자전거를 타고 공원이나 한바퀴 도는 그저그런 인생을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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