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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하 Dec 18. 2023

프롤로그


준비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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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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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요!"


어릴 때부터 손드는 것은 내 특기였다. 정답을 알 때도 손을 들었지만 질문이 있을 때도 주저 없이 들었다. 반박할 말이 생겼을 때도 들었고, 그저 발표의 순서를 정할 뿐일 때에도 나는 가장 먼저 손을 들곤 했다. 늘 바빴던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단 한 가지를 말해주었다. 먼저 손드는 사람이 멋진 사람이야. 나는 먼저 손들기 위해 숙제도 열심히 하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어쩌면 그건 아빠를 닮은 것인지도 몰랐다. 아빠는 누구에게든 할 말이 생기면 망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 특기는 학창 시절 내내 장점이 되었다. 나는 정답을 잘 맞혔고, 질문도 잘했다. 고등학교 시절엔 선생님들을 쫓아다니며 질문을 해댔다. 내가 교무실에 나타나면 선생님들은 못 말린다는 표정을 했다. 대학교를 다니면서는 질문은 물론 반박도 자주 했고, 수업시간 내내 교수님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기도 일쑤였다. 학부 시절 나랑 가장 많이 논쟁하던 교수님은 수업이 끝나고 나에게 부디 변치 말라고 당부하시며 덧붙이셨다. 넌 나였어. 칭찬이었다. 나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그래서였을까. 난 세상이 법학도를 위해 정해둔 길, 로스쿨에 질문했다. 왜? 나는 다른 길을 가겠다 반박했다. 내 인생의 정답이야말로 나만이 맞힐 수 있는 것이라고 자신했다. 좁은 길이라도 내가 먼저 가서 증명하면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난 스위스로 갔다. 국제법이 태어나고 만개한 곳, 제네바로 가서 국제법을 공부했다. 공부를 마칠 때쯤 국제기구에서 일을 시작했다. "세계"로 시작하는 회사 이름은 먼 땅 한국에 사는 엄마 아빠의 자랑이 되었다. 꿈을 이뤘으니 나 또한 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


3개월은 오롯이 행복했고, 그 후 6개월은 힘들지만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침몰하고 있었다. 반복적인 업무는 금세 단순하게 느껴졌다. 일을 계속할수록 점점 멍청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갈수록 회사는 과도한 양의 업무를 줬다. 반박하면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싫은 일을 많이 하기까지 하면서 내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되었다. 성장도 아니었고 미래도 보이지 않았다. 국제법이 정의롭다고 해서 국제법을 다루는 회사가 정의로운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법학을 전공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다 올바른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는 것 또한. 일하기 시작한 지 1년이 채 되기 전의 일이었다.  


그 후 2년은 버티는 시간들이었다. 퇴사해야 한다는 것만 확실했다. 언제 하는 것이 최선일지, 회사를 나가면 무엇이 하고 싶은 건지 등을 자문하며 난 수 없이 흔들렸다. 퇴사할 날짜와 방향을 정하고 나서도, 흔들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온 우주가 도와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다못해 1년만이라도 더 다니면 주머니 두둑하게 나갈 수 있는데. 회사에 다녀도 주말은 내 거잖아. 주말을 활용해서 행복해져 보면 어떨까? 두 개의 자아가 내 안에서 매일 싸웠다. 하지만 스스로를 돕지 않는 사람을 도와줄 우주는 없었다. 1년이라도 더 다니다간 이제 조금밖에 안 남은 나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릴 것 같았다. 일주일이 7일인데 그중 고작 이틀만 내 것이라는 게 부당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생각해 보아도 떠나는 것 말고는 없었다. 이 불행에 종지부를 찍을 방법이.


마침내 나는 다시 손을 들었다. 여기서 일하느니 백수가 되겠다고 했다. 주머니도 별로 두둑하지 않고, 여전히 흔들리는 채로. 오랫동안 꿈꿔오던 제네바였다. 투명하게 찰랑이는 레만호를 바라보며 가슴이 벅차오르던 게 엊그제 같은데, 같은 호수를 바라보며 인생무상을 느꼈으니 떠나야 할 계절이었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기 마련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니 일단 천천히 풀어보기로 했다. 이 이야기의 끝에서, 나의 시작을 찾을 수 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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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를 상징하는 레만호의 명물, jet d'eau 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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