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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 Oct 09. 2020

내 취향대로의 집

지방에 아주아주 오래된 구축 아파트를 사기로 결심한 이후부터 내 관심은 온통 어떻게 그 공간을 꾸밀 것인가였다. 언제나 인터넷 블로그에 소개된 집들을 보면 어찌 그리 다들 이쁘게 해 놓고 사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생애 처음으로 구매한 집을 원 없이 나만의 취향으로 꾸며놓고 싶었다.


정보는 넘쳐났다. 하지만 문제는 정말로 내가 어떤 집을 원하는지 나 스스로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즉 내 취향을 나도 모른다는 슬픈 사실을 깨닫고 솔직히 많이 당황했다. 왜냐하면 난 대학에서 인테리어 관련 학과를 전공했고 평소에도 인테리어 잡지, 블로그 등을 즐겨 보기 때문에 당연히 멋진 집을 꾸밀 것이라는 스스로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런데 정작 내가 뭘 좋아하는지는 모른다? 이런 젠장. 남들은 어떨까? 주변인들에게 물어보았다.


"친구, 어떤 집에 살고 싶어?"

"쾌적하고 햇볕이 잘 들고 채광이 좋고 뻥뻥 뚫린 집. 그리고 하얀색에 짙은 우드 톤으로 꾸미고 싶어"

"동생, 어떤 집에 살고 싶어?"

"깔끔하고 편리한 집. 큰 책상이 있는 작업실이 있었으면 좋겠어. 또 수납공간이 많고 동선이 효율적이고 청소하기 편한 집. 인테리어는 미니멀리즘."

"조카, 어떤 집에 살고 싶어?"

"곰팡이 안 살고 벌레 안 나오는 집이요. 또 바닥이 따뜻해야 해요."

"딸, 어떤 집에 살고 싶어? "

"호텔."

"그건 집이 아니잖아!"

"장기 거주하면 집이야."


그렇다. 다들 집에 대한 나름의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난 나만의 공간을 꾸미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만 있었을 뿐 구체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보다 더 열심히 이 집 저 집 블로그를 힐끗 거리며, '내가 이 집에 살면 어떨까? 이런 식탁에서 밥을 먹으면 어떤 기분일까? 이런 방에서 아침을 맞이 한다면? 이런 욕실에서 이를 닦는다면?' 등의 상상을 해 보았다. 카페나 레스토랑을 방문해서도 그곳의 벽, 바닥, 의자, 테이블 등의 디자인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회사 다닌 지 2년 만에 마침내 회사 바닥 타일의 색깔을 정확히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여하튼, 이런저런 노력을 기울인 덕분인지 요즘 어렴풋이나마 내가 살고 싶은 공간에 대한 구체적 이미지가 생겨나고 있다. 최소한의 가구로만 채워진 여백이 많은 공간. 너무 어둡지 않은 나무 바닥에 너무 하얗지 않은 하얀 벽, 화려한 조명 대신 따뜻한 조명이 감싸고 있는 명상하기 좋은 공간. 원목의 동그란 식탁과 베이지색 패브릭 소파... 사실 아직도 실제 형상화하기엔 부족한 수준이라 매일 '내가 만약 이 공간에 산다면? 저 공간에 산다면?'을 반복하며 열심히 상상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참 신기하다. 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집이라는 공간에 살아왔는데 요즘처럼 치열하게 내가 진정 원하는 공간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없다. 어릴 때는 그냥 부모님 취향의 집에 얹혀살았고, 그 이후엔 돈에 맞춰 그때그때 사정에 맞춰 그냥저냥 생각 없이 공간을 채워온 것이다. 이제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가 되어서야 내 공간의 중요성에 대해 깨닫게 되다니, 역시 집은 내 이름으로 되어 있어야 하나 보다.


이제 다음 달부터 내 상상의 공간은 하나하나 현실화될 것이다. 즉 인테리어 공사가 시작된다. 물론 많은 부분 현실과 절충해 나가야 하겠지만, 여하튼 좀 설렌다. 그리고 치열하게 고민한 만큼 새로 만들어질 공간은 나에게 따스한 둥지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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