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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근 Oct 04. 2021

보지 않은 꽃

제 목 :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

부 제 : 법정과 최인호의 산방 대담

지은이 : 법정, 최인호

출판사 : 여백

출간일 : 2015년 3월 1일

사 양 : 192쪽 / 120ⅹ186mm



어떤 사람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 도착한다는, 어떤 여성의 기계적 목소리가 반복될수록 그의 마음은 초조해졌다. 저 신호등에만 걸리지 않았어도 제시간에 버스를 탈 수 있을 텐데. 그는 속으로 빨간 신호등을 초록으로 바꾸는 주문을 간절하게 외웠다. 소용없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음에도.


그는 버스에 가장 먼저 탑승하기 위한 수식을 세웠다. 정류장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이길 수 있는’ 중요한 과업이었다. 버스가 와야 할 거리와 평균 속도, 정류장 내 사람 수와 연령대, 자신의 걸음 속도 등 다양한 변수들을 확인하고 그에 적절한 가중치를 집어넣었다. 완전한 식에 가까워질수록 그는 묘한 승리감을 느꼈다.


그때 한 여자아이가 그의 앞을 지나갔다. 그 아이는 다리의 움직임이 약간 불편해 보였고, 한쪽 얼굴은 약간 틀어져 있었다. 그는 자신보다 버스에 빨리 탈 수 있는 조건이 부족한 그 아이에게 안타까운 눈길을 흘겼다. 그는 다시 그 아이를 흘깃 쳐다보았는데, 아이의 눈은 신호등도 버스도 아닌 다른 어떤 것을 보고 있었다.


꽃이었다. 그 아이의 눈은 햇빛을 말갛게 머금은 꽃으로 만발해 있었다. 그 아이의 눈은 자연스럽게 꽃을 피워 낸 ‘사람다운’ 눈이었다. 그는 깨달았다. 정류장을 수도 없이 오갔지만 그곳에 꽃이 피어 있단 걸 전혀 몰랐다는 사실을. 몇 초라도 빨리 버스를 타기 위해 온갖 쓸데없는 변수들만 고려했을 뿐, 그의 눈은 아름다운 꽃 한 송이 담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의 눈은 ‘사람답지 않은’ 눈이었다.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는 우리가 지나쳐 버린 꽃들에 대해 법정 스님과 최인호 작가가 나누는 산방 대담집이다. 그들이 말하는 꽃은 꽃잎이 떨어졌다 한들 결코 지지 않는 꽃이다. 그것은 사람을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행복, 사랑, 죽음과 같이 사람의 삶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가치들이다. 그 꽃은 지지 않으며, 결코 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꽃들을 보지 못한 채 지나쳐 버린다. 꽃잎만이 꽃의 전부인 줄 알고 꽃을 진정 꽃으로 만드는 가치를 외면한다. 자신이 원하는 버스가 일찍 오지 않음에 화를 내고, 누구보다 먼저 버스에 타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내 주변에 꽃 한 송이 피어 있지는 않은지, 버스를 타기엔 너무 많은 짐을 들고 있는 할머니는 없는지, 거동이 조금 불편하여 버스를 탈 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없는지 우리는 무관심하다.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는 나 혼자 버스를 잘 타면 된다는 생각을 질타한다. 그리고 인류가 오랫동안 소중하게 가꾸어 온 꽃들에 무관심한 ─ 보지 ‘못한’ 실수가 아니라 보지 ‘않은’ 잘못이었음을 일깨운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행복을 보지 않았다. 대신 머나먼 성공을 향해 스스로를 끝없이 마모시켜 왔다. 우리는 옆 사람이 나눠 주는 사랑을 보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당장에 소유하려고만 들었다. 우리는 삶의 끝에 있는 죽음을 보지 않았다. 대신 내가 가진 것들을 뺏길까 봐 단단히 붙들고만 있었다.


최인호 작가가 행복에 대해 말했다.

작은 것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눈. 그런 눈이 보통 사람에게는 없어요. 그 눈을 어떻게 떠야 하지요? 대개는 심 봉사처럼 공양미 3백 석이 있어야 눈을 뜬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냥 뜨면 되는데. (45쪽)


법정 스님이 죽음에 대해 말했다.

죽음이란 조금도 두려워할 것 없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대신 내가 지금 이 순간순간을 얼마나 나답게 살고 있는지가 우리의 과제이지요. (…)
죽음 앞에서 두려워한다면 지금까지의 삶에 소홀했던 것입니다. (177쪽)


고백하건대, 버스를 기다리던 그 사람은 바로 나였다. 지금 그 정류장엔 꽃이 아예 사라져 버렸다. 자동차가 내뿜는 매연과 아스팔트가 내뿜는 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곳을 지나쳐 간 무관심이 꽃을 진정으로 시들게 한 것은 아닐까? 우리는 꽃은 보지 않고 눈과 마음 안에 잡초만 무성히 키워 왔는지 모른다. 꽃잎이 떨어져도 지지 않는 꽃이 있다. 우리는 잡초를 걷어 내고 꽃을 찾아내야 한다. 사람다운 눈을 뜰 수 있도록, 보지 않은 꽃을 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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