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닮아가는 여행
여행은 보고 듣기만 해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단어다. 여행을 위한 정성과 노력, 그것이 주는 기대와 설렘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리고 여행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인 ‘즐거움’. 그 즐거움은 여행을 어떻게 즐기는가와 직결된다.
여행의 즐거움을 누리는 방법은 나이와 시기에 따라 다르다. 돈이 없었으나 열정적이었던 20대의 젊은 날에서부터 노련해지고 여유로워진 30대에 이르기까지 내가 나이를 먹듯, 여행 또한 나와 함께 늙어가며 그 방식이 변해간다.
20대. 처음으로 여행이 주는 즐거움을 알게 된 시기다.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 착륙하여 출입국 사무소를 마주하는 순간, 타국의 공항에서 미아가 된 듯한 느낌, 숙소로 가는 길, 그리고 지도를 펴고 가고픈 곳을 다 둘러보는 열정과 에너지. 이 모든 것이 20대 여행의 즐거움이었다. 혈기왕성하며 동시에 열정적이고, 전투적이며 무모했던 이 시기에는 하나라도 더 보고 사진으로 담는 것이 나의 즐거움이었다. 기억에 가장 남는 일이 있다면, 프랑스 중부지방의 한 숲 속 호숫가에서 웃통을 벗고 맨발로 숲을 달렸던 일과, 텐트와 자전거만 챙겨 떠난 프랑스 남부 여행을 꼽을 수 있겠다.
프랑스 유학 시절 어느 여름, 봉사활동 참여를 위해 프랑스 중부지방(Clerment Ferand)을 간 적이 있다. 봉사활동 후 휴식을 취하기 위해 인솔자가 우리를 버스에 태워 한적한 곳으로 데려갔다. 그곳엔 숲이 있었고, 안쪽에 큰 원형의 호수가 있었다. 모두가 누워서 쉬거나 수영을 하던 때, 난 숲 속을 뛰기로 결심했다. 윗 옷을 벗고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다치거나 부끄러움 따윈 없이 냅다 숲 속을 달렸다. 마치 허물없이 자유로운 자연인이 된 것 같았다. 문득 남의 눈치를 보며 의견도 못 내고, 부끄럽고 소심했던 내 모습들이 떠올랐다. 그 모습의 나에게 보란 듯이 타잔처럼 숲을 헤쳐 달렸고 출발했던 곳의 반대편 돌 위에 올라갔다. 내리쬐는 태양빛, 푸른 호숫가를 넘어 보이는 출발지점이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다. 한국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며 스스로 자유로웠던 기분이었다. 나비가 되기 위해 애벌레가 그의 세상인 고치를 네 번이나 파괴하듯이, 억압이란 고치를 파괴하고 스스로가 해방된 순간이었다.
프랑스 남부 여행은 무모하고 도전적이었다. 모나코에서 마르세이유까지 쭉 뻗은 해변도로를 따라 자전거를 타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떠난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12일이라는 시간적 한계로 인해 빨리빨리 움직여야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모나코와 니스 사이에 있는 EZE라는 산마을인데, 버스로 30분 이상 걸리는 거리였다. 저녁이었지만 버스 요금을 아껴보고자 내 어깨를 부술 것 같은 배낭과 자전거를 끌고 꾸불꾸불한 산길을 올랐다. 지금 생각하면 ‘무식했다’가 적절한 표현이다. 하지만 올라가며 볼 수 있었던 야경은 여행 중 내가 받은 최고의 선물이었다. 까만 밤하늘을 홀로 비추는 달빛이 바닷가를 감싸고, 그 옆으로 붉은 불빛을 품은 도시의 야경이 보였다. 달빛을 품은 검은 바다와 경계한 도시의 불빛은 마치 나만을 위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야말로 ‘내 생애 최고의 야경’이었다. 땀에 찌들었던 찝찝함과 산길을 오른 피곤함도, 타오르던 발바닥과 후끈거리던 손바닥은 야경 앞에 무의미했다.
30대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여행 스타일은 많이 바뀌었다. 그리고 즐기는 방식 또한 바뀌기 시작했다. 먼저 젊은 날의 여행과는 반대로 한 곳을 깊게 느끼게 됐다. 여러 장소를 이동하며 시간과 목표에 쫓기지 않는다. 몸의 피로는 최소화함으로써 심리적 만족도를 높이는 방법이어서, 확실히 여유를 더 가질 수 있고 머무르는 공간을 한층 더 깊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방법. 그건 바로 ‘조식’과 ‘뒤돌아 보는 여유’다.
나는 호텔을 찾을 때 별로 매겨진 점수보다는 ‘조식’에 대해 좋은 리뷰가 달린 호텔을 선택한다. 리뷰를 잘 읽어보면 솔직하고 냉철한 평이 많기 때문에 별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정보다. 특히, 조식에 대한 리뷰를 통해 호텔의 퀄리티를 가늠할 수 있을뿐더러, 여행하는 내내 조식이 하루의 기분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시작이 좋아야 끝이 좋다고 했던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조식은 모로코에서 묵었던 Riad(모로코 전통 집)라는 곳에서다. 호텔의 흔한 뷔페식 음식들과 인테리어와는 다르게, 모로코 전통 타일로 만든 테이블 위에, 고소한 모로코 빵과 햇빛을 잘 받아 당도가 높은 과일로 만든 핸드메이드 과일잼과 샐러드, 소스, 올리브, 직접 짜낸 오렌지주스, 그리고 허브티 등은 아침부터 신선함을 선물한다. 특히 모로코 아주머니가 직접 차려주시니, 내가 정말 대접을 잘 받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조식 자체가 주는 든든함도 있지만, 그 시간은 여유를 가지며 차분히 일정을 돌아볼 수 있게 해 주고, 민박집 아주머니와 대화를 나누며 현지인만이 아는 여행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 처음 접해보는 문화였지만 정을 나눌 수 있는 따뜻한 사람들이라는 느낌과 함께, 앞으로의 여행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찌는 듯한 날씨에 제대로 된 화장실도 없고, 비싸게 흥정만 해대는 장사꾼들이 판치지만, 그것조차 즐거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조식의 힘이다.
음식은 한 나라의 문화를 대표한다. 맛있는 음식은 실망했던 것도 잊게 해주는 마법을 지니고 있다. 여행지의 문화를 담은 아침 한 끼가 주는 즐거움. 이제 조식은 내 여행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돼버렸다.
다른 한 가지 방법은 걸어온 ‘길을 잠시 뒤돌아 보는 여유를 가지는 것’이다. 이제 나는 여행을 할 때 꼭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본다. 그리고 왔던 곳을 가만히 쳐다본다. 그러면 이제와는 다른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마치 산 정상에서 밑을 내려다보듯, 내가 서 있는 곳까지 걸어왔던 길을 돌아보면 그 공간과 순간을 새롭게 느낄 수 있듯이. 돌아보는 습관은 순간의 여유를 둠으로써 스스로를 돌아보게 해 줬다. 여행을 온 이유, 걱정거리, 소중한 것들, 사랑하는 사람 등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한다. 그러면 나 자신도 모르게 지쳐있거나 굳어있던 몸이 유연해지고, 잠잠해진 감성은 다시금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마음을 적신다. 이렇게 차근차근 여행을 하다 보니 이젠 나만의 감성 근육이 튼튼해짐을 느낀다. 그리고 행복을 새롭게 느낀다. 굉장히 쉬운 일이지만 잠시 멈추는 게 예전엔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
최근에 읽은 류시화 시인의 책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에서 작가는 여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행은 꼭 무얼 보기 위해서 떠나는 게 아니니까. 우리가 낯선 세계로의 떠남을 동경하는 것은 외부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함이니까’. 이 글을 보고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보는 것 또한 같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잠시 나의 여정에 쉼표를 두고 나를 위해 돌아온 길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기회. 새로움이 특별한 이유는 익숙함의 소중함을 알려주기 때문이듯, 내가 온 길을 잠시 멈춰 뒤돌아 볼 줄 아는 여유도 가져보는 건 어떨까?
여행도 나이를 먹어간다. 그렇게 여행도 나를 닮아 간다. 언제 또 여행에 대한 스타일이 변할지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나이 든 여행이 자꾸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