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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mme soupe Jul 20. 2021

냄비 받침이 되고 싶은 책


 뜨거운 냄비를 양손으로 들어 올려 식탁 앞에 섰는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냄비 받침이 없다. 이 뜨거운 것을 그대로 올렸다가는 식탁이 망가지고 말 것이다. 안될 일이다. 저기 쌓여있는 중에서 하나를 냄비 받침으로 써야겠다 했을 때 기꺼이 냄비 받침이 되어 주고 싶은 책이 있을 까.


응 나는 이미 여러 번 읽혔으니 내가 기꺼이 냄비 받침이 될게. 

아니야. 나는 사놓고도 손길을 한 번도 안 받아 본 책이니 내가 가는 게 맞아.

무슨 소리 출간된 지 내가 가장 오래되었는 걸. 나는 이제 갈 때가 되었어.

아닙니다. 초판 신입인 제가 가겠습니다. 

나는 양장본이니까 뜨거운 동그라미를 좀 견딜 수 있을 테니 내가 가볼게. 

다들 멈춰, 나는 작고 얇은 것이니 내가 희생하는 게 맞아. 


 쓰다 보니 좀 슬프다.


 대학생일 때 처음으로 자취방이라는 공간을 가보게 되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야 본가에서 나올 수 있었던 나는 친구의 자취방이라는 독립적 공간을 늘 동경했었다. 대학생이 가질 수 있는 방은 좁고 덥고 꼬질꼬질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만의 공간을 가진 친구들은 어쩐지 나보다 훨씬 더 어른처럼 느껴졌다.

 친구는 라면 끓인 냄비를 들고 상 앞에 서서 턱으로 책 더미를 가리켰다. 야 아무 책이나 좀 올려나 봐. 차마 그 책 더미에서 새로운 냄비 받침을 고를 수는 없어 몇 번 그렇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동그랗게 탄 원을 가슴에 품은 전공서 하나를 올렸다. 야 이걸 이렇게 쓰냐 라고 말하면서도, 그즈음 우리들의 젊은 삶을 욕보이던 징글징글한 수업이어서 곧 후루룩 짭짭 먹어치워 버리고 말 라면 냄비 따위에 깔려 지글지글 표지를 굽고 있는 모습이 좀 통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지금 생각해보니 아무리 그래도 좀 잔인했다 싶다.) 아무튼 책이 냄비 받침이 될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처음 알았다. (책상 잠을 베개로 쓰는 것은 봤어도 - 이건 그래도 머리를 받치는 용도가 아닌가!) 

 뭐 대단한 것이라고 그랬을까 싶지만 졸업을 앞두고 학부 논문을 몇 권 더 제본으로 만들어 친한 동기에게 선물하는 것이 그 즈음의(라떼의) 유행이었다. 이를테면 서로의 찌질함을 4년간 지켜봐 주었다는 의리의 선물 같은 것이었는데 첫 페이지에 한 마디씩을 적었다. 멋있는 말도 있고 유쾌한 말도 있었는데 단골 멘트는 '냄비 받침으로 쓰지는 마.'



 어느 작은 서점 주인이 쓴 글에 놀란 일이 있다.  

이른바 인증샷족에 대한 얘기였다. 서점에 들어와 특정 책을 찾고 표지 사진을 찍고 특정 페이지만 복사하듯 담아 오분만에 퇴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서점에 왔다고 해서 만져본 모든 책을 사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사람들은 sns용 인증샷을 찍으려고 서점에 오고 그래서 책을 대하는 태도(찢어가는 사람도 있다고)도 무척 달랐다고 한다. 하루 이틀 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족'으로 묶일 수 있는 정도여서 서점 주인은 켜켜이 쌓은 화를 짧은 공지글에 풀어내 담고 있었다. 서점이 태그 된 피드를 살펴보면 실제 구매자 거나 책을 관심 있게 읽은 사람보다는 인증을 위한 인증샷족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책을 읽은 척은 하고 싶은 사람들.

 어느 유명 비스트로의 주인은 이렇게 적었다. 정말 아끼는 본인 소장의 서양 요리서(최근에 아주 유명해진- 심지어 표지만 같은 가짜 상자 책도 판다.)를 가게에 두었는데 손님들이 음식 인증사진을 찍을 때 책을 꺼내 위에 음료를 올리거나 본인들의 테이블 연출용으로 쓴다는 것이었다. 한두 사람의 일이 아니었고 과정에서 음식이 묻은 책은 얼룩이 지고 상해버렸다고 했다. 그럼 아끼는 것을 거기에 두었냐 하고 물을 있을 텐데 책을 책으로 꺼내 읽을 알았지 음료를 올릴 줄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


 독자님들께서 감사하게도 종종 내 책을 사진에 담아 올려주시거나 인증 사진을 찍어 보내주시기도 한다. 독자님들의 소중한 공간 곳곳 특히 그분의 책장에 자리를 잡은 책을 보면 기뻐 가슴이 막 두근거리고 순간순간 뭉클해져 조금 울 때도 있다. 우스운 말일지도 모르지만 다행히 냄비 받침은 되지 않았군.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안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주 간혹 인증만을 위한 인증 사진을 보게 되는 날도 있다. 내용은 읽지 않았지만 표지가 예뻐서 담았다거나 내용은 모르는데 제목이 마음에 들어 개인 삶의 모토로 삼겠다는 글을 읽기도 했다.(응? 내용을 모르는데요?) 또 종종 음료를 담은 컵을 올린 사진도 봤다.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예쁘게 담으려다 보니 그런 거지. 하고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어쩐지 가슴에 찬바람이 휑 하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예뻐서 갖고 싶은 책, 인기 있는 책, 샀다고 하면 안될 것 같은데 영 사고 싶지는 않은 책이 나에게도 있다. 모든 책을 사고 모든 책을 읽을 수는 없으니 나도 그래서 책을 사고 또 그래서 책을 사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라도 책을 냄비 받침처럼 쓰지 말아야겠다고 오늘 또다시 다짐한다. 아무리 부족하고 못났어도 기꺼이 냄비 받침이 되고 싶은 책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냄비 받침이 되고 싶은 책

글 ㅣ  pomme soupe. 김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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