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매일 같은 동작을 하며 안정을 얻는다.
순서까지 같을 때도 있지만 순서가 조금 뒤바뀌어도 하루라는 단위 안에서 안 하고는 못 넘어가는 동작들. 이를테면 아침 커피를 만드는 일이라든가 밖으로 꺼내 놓은 그릇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일. 책장에 꽂힌 책의 기울기를 맞추는 일 같은 것들은 이제는 무의식의 범주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손에 익어있다. 이 동작들은 두 번 세 번은 다시 해도 한 번도 안 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연필깎이처럼 손잡이를 돌려 콩을 갈아내는 수동 그라인더는 작년부터 사용하지 않는다. 재택근무자의 몫까지 추가된 커피를 만들다가 안 그래도 부실한 손목에 파스 마를 일이 없어지자 남편은 전동 그라인더를 사 왔다. 콩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콩을 원하는 굵기로 갈고 알아서 멈추는 심플한 녀석이다. 다만 그 소리가 제법 시끄러워서 재택근무자들의 노트북들이 on 상태일 때는 사용이 어렵다. 그래서 또 찾아낸 방법은 전동 그라인더에 콩을 담고 비어있는 아무 방에나 데려가 홀로 일하도록 두고 방문을 꼭 닫는 것. 진동소리가 잦아들면 꺼내와 커피를 만든다.
매 아침마다 커피를 만들면서 지금 내가 딛고 있는 오늘을 생각한다. 콩을 갈고 드립포트에 물을 채워 데우고 종이필터를 적시고 마침내 마른 콩에 물을 주어 부푸는 것을 구경하며 아무렇게나 뛰고 있던 심박수를 정돈한다. 이것이 내가 낯선 오늘을 안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동작이다.
밤 잠자리에 누워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대한 것들이다. 온전히 설렌다는 감정은 어린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나이 이후로는 잘 못 느껴본 것 같다. 설레어야 마땅한 일도 불안과 걱정이 그 위를 한 겹 감싸고 있는 기분이 들 때가 더 많다. 그런데 그 편이 조금 더 안전하다고 느껴진다. 설렘이 깨지기 쉬운 유리 재질이라면 불안과 걱정은 엠보싱이 있는 두꺼운 비닐에 가깝다. 깨지지 않도록 잘 감싸 안전한 장소에 다다랐을 때 비닐을 잘 벗겨내기만 하면 온전하게 담겨있는 설렘을 꺼내볼 수 있으리라. 하고 생각한다. 아침이 되면 익숙한 동작들을 하며 밤의 불안을 천천히 벗겨낸다.
본 뜻의 축소가 일어나 어느 한 부분만을 지칭하게 되는 단어들이 있다. 그런 단어들이 유행처럼 쓰이면 어쩐지 너무 사용하기 싫어진다. 힐링이라는 단어가 그랬고 요즘은 루틴이라는 단어가 또 그렇다. 그렇지만 결국 그 단어를 꺼낼 수밖에 없는 순간이 있는데 오늘을 안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매일의 습관적 동작들을 꼭 한 단어로만 말해야 한다면 그것이 바로 루틴이겠다. 다만 이 단어를 미라클 모닝이나 아침형 인간처럼 거창한 시간의 흐름이나 계획에 가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화단의 식물에 물을 주고 익숙한 골목을 걷거나 백번도 더 들은 플레이리스트를 걸어두는 것, 내가 매일 닿을 수 있는 사람과 공간의 안면을 다정히 익히는 일이라든가 책상 밑에 놓여있는 (내가 아니고는 그 누구도 갈아 신을 리 없는) 낡고 냄새나는 실내화를 떠올리며 지하철에 오르는 일처럼 그것이 미래에 일어날지 모르는 낯설고 미세한 변화들을 안정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내 앉은 자리와 시간을 공고히 다지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글 사진 ㅣ pomme soupe. 김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