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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별빛 Jan 02. 2021

엄마돼지의 미소는 찐이다

"마치 자신 외의 모든 시간은 정지된 듯 ...."

멜버른 날씨가 또 널을 뛴다.
좀처럼 중간을 찾아볼 수 없는 극단이 날씨는 마치
하루만 살다 는 하루살이 인생같이 맹렬하다.

계절의 맥락은 과감히 생략된 채,
매우 더움, 매우 추움이 하루상간으로 손바닥을 뒤집는다.
어제는 코끝이 시리고 손이 차가워 긴 소매를 쭉 당겨
시린 손을 덮었는데 오늘은 후덥한 바람이
강렬한 태양을 더 뜨겁게 뜨겁게 달군다.

일주일 전, 친구들과 인터넷으로 작은 미니농장의 입장권을 살 때만 해도 오늘이 그 공포의 날이 될지
아무도 몰랐다.

이미 세 가정의 엄마들과 떼로 구입한 표는
총 9명이라는 머릿수가 무색하게 달랑 한 장의 표로 출입문을 통과했다.
환불원정대가 기 세게 달려들어도 이 표의 내 몫은
절대 환불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호주의 거대한 땅덩어리는 반은 사람이 살고
반은 초원이 산다더니 미니농장이어도 면적이 꽤 크다.
널찍한 곳에서 드문드문 노니는 동물들도 더운지
혀를 쭉 빼고 관광객을 맞이했다.

수탉이나 꼬리가 독특하게 하늘로 솟구친 꿩이나 오리들은 우리에 있지 않고 거리에 풀어놔
자연 친화적으로 노닌다.

뛰어다니며 오리를 쫓거나 고개를 조아리며 먹이를 찾는 닭에게 빵부스러기를 내미는 아이들은 너무 신이 났다.
그 더위에 마땅한 그늘 하나 없이 이어진 초원에서 동물들을 하나하나 손짓하며
 
“엄마 이것 좀 봐. 빨리 좀 와봐.
이거 사진 찍어줘, 엄마!
우와~ 나 방금 사슴뿔 만졌어”
 
얼린 얼음물 몇 개, 간식과 음료수들이 가득 담긴
배낭을 등에 메고  뛰어다니는 아이들 속에서
내 아이를 예의 주시해야 하고 간간이 사진도
찍어야 하는 고된 작업은 내 등을 흥건하게
땀으로 적셨다.

괜히 집에나 있을 걸 하필 이런 날 와서 무슨 개고생이야
조금씩 지쳐갈 무렵,

진흙탕 속에 혼자 누워있는 엄마돼지가 눈에 들어왔다.
스무마리는 족히 돼 보이는 돼지 새끼들이 바글바글
서로 먹이를 두고 밀치고 싸운다.
우르르 몰려와 사진을 찍고 떠들어대는 관광객들의
거친 소음에도 엄마돼지는 꿈쩍하지 않았다.
 
혹시 이 더위에 쓰러진 건 아닌가? 가까이 다가가니….

앗!


엄마 돼지는 웃고 있었다.

마치 자신 외의 모든 시간은 정지된 듯
엄마 돼지는 웃고 있었다.
 
이 더운 날, 환불 받을 수 없는 15불이 아까워 이곳을 온것만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니까. 나는 굳이 보고 싶지 않은
동물들을 땟볕에 하나둘 올라올 기미들에
겁먹지 않고 아이들의 행복에만 집중한 것이다.

그 수고로움에도 나는 엄마니까,
희생이란 거창한 단어도 슬쩍 꺼내보았다.
 
그래서 나는 돼지처럼 웃지 못했나.
땀같은 육수를 주룩주룩 흘리면서
내 행복보다는 아이들의 행복에 집중했었나.
너희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다고 꾸역꾸역
올라오는 나를 위로하고 있었나.
 
희생이란 말은 그래서 영원히 거창하다.
오롯이 내것이 될수 없는 단어.
절대 나는 가질 수 없고 반드시 줄 때만 사용가능한 단어.
 
나는 웃는 엄마돼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사실은 니가 너무 부러웠다고...
수십개의 비난의 눈을 아랑곳하지 않고
너에게만 집중하는 엄마인 니가 미치도록 부러웠노라고….
 
쓰윽 미소지었다.

내 가슴 속 희생을 꼬깃꼬깃 접으며 나는 또 달린다.
”알았어. 엄마, 지금 가“
 
무겁게 매달린 배낭이 경쾌히 흔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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