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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별빛 Dec 22. 2020

"글감도 오래 두면 썩어요!"

잘 쓰고 싶은 욕심이 나의 글을 쓰레기로 만들었다.

한 트레이 씩 큰 박스가 여러 번 옮겨진다.
입이 떡 벌어진다.
체리 두 박스 , 거봉 6개 묶음 1박스, 블루베리 12개

한 박스..
 
“ 이걸 다 누가 먹어?
스페셜이라 줄 서서 사 온거야.
  진짜 싸더라고.."
 
살짝 젖은 티셔츠를 보니 그가 아침부터 얼마나 고군분투하며 저 무거울 걸 차로 여러 번 옮겼을지

짐작케 다.
 
“있으면 다 먹겠지..”
 
주방 벤치탑에 산처럼 쌓인 과일 박스가 자기가 보기에도
머쓱했는지 혼잣말처럼 살짝 흘리고 간다.

호주 마켓은 농장에서 직송되는 제철 야채나 과일을 파는데,
매일 스페셜 상품을 더 싸게 내놓는다.
가끔 배추 하나에 1불 하는 득템의 기회가 찾아오면 한국인들은 온라인 카페에 정보를 나누고
서로서로 맛있게 빨간 김치 인증샷을 올린다.
우리에게는 그날이 바로 김장철이다.
 
남편은 이런 날을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시세보다 싼 세일 상품에 눈이 획 돌아 못 사면 손해, 무조건적으로 달겨든다.
물건 앞에 이 치명적인 약점은  질보다는 양,

양 보다는 가격에 절대가치를 둔다.
 
역시 오늘도 냉장고가 꽉꽉 빈틈없이 들어찬다.
 
'이걸 다 언제 먹냐'
 
매번 냉장고 속에서 세월을 보내다
하얀 곰팡이 털옷을 입고 이내 폭삭 꺼져
통째로 아낌없이 쓰레기통으로 버려지는 스페셜 과일들.
나는 그것들의 운명을 알기에 걱정부터 앞선다.
 
“엄마 또! 또 이거야?”
 
먹어치우는 속도보다 냉장고에서 뭉개지는 속도가
더 빨라 며칠째 같은 과일이 초라하게 상위에 올라간다.
아이들의 불평에 남편을 째려보지만 별 수 없다.
 
그러나
나 또한 물릴 때로 물려 잠시 과일을 모른 척했다가는
그것은 어김없이 냉장고에서 흐느적거리다 말라간다.
랩으로 감싸 차가운 입김을 쌕쌕 뿜어내는 신선 칸에 넣어본들 과일은 이내 처음의 싱싱함을 잃고
눈이 괭한 죽은 생선 같은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루하루 시간이 갈수록 온갖 잡다한 냉장고 냄새를 빨아들인  과일을 ‘먹어야지, 빨리 먹어야지’ 하면서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마치 나의 오래된 글감처럼 말이다.
신선한 아이디어나 소재가 번뜩 떠오르면


‘이렇게 기발한, 오! 참신한데..’


실실거리며 그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곤 한다.

그러나 그렇게 쌓인 나의 글감들도 시간이 지나자

어김없이 냉장고에 썩어가는 과일 뭉탱이처럼
손을 쓸 수 없이 퍼렇게 싹이 트고 뭉개졌다.
 
그땐, 조금 더 묵히면
더 좋은 이야기로 발전될 거라 기대했다.
묵은지처럼 묵히면 더 진하고 깊은 감칠맛이 날 줄 알았다.
 
그러나 사실 이런 생각은 나의 게으름에 대한

일종의 변명이었다.

“아! 좀 더 생각이 정리되면 마무리해야지..”
“오늘은 쓸 기분이 아니야”
“뭔가 책을 더 읽고 머릿속을 채워 넣어야 더 잘 쓸 수 있어”
 
그럴싸한 이유를 덧붙여 나를 우쭈주 하며
이내 넣어두었던 나의 글감들이
어느덧 쉰내를 풍기며 쓰레기통으로 사라져 갔다.
 
잘 쓰고 싶은 욕심이
잘 써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
산처럼 쌓아 올려진 글감들을 결국
메모장에서 썩고 부패하게 만들었다.
 
나는 탱글탱글 알이 꽉 찬 은빛 활어같이 싱싱했던
나의 글감들을 쭉 훑어보았다.
채워 넣기만 하고 비우지 않는 서랍은 열기가 싫다.
그래서 오래 내버려 두었는지도 모르겠다.

욕심껏 꽉꽉 채운 나의 글감들을 이제는 비워보고자 한다.
 
소화할 수 있는 만큼의 적당량을 짚어
욕심내지 않는다면,
낡은 것은 과감히 버리고 고장 난 것은 잘 고쳐 쓴다면,
나도 매일같이 신선한 식재료를 사서 먹는
내 날씬한 친구처럼 부지런해지지 않을까.
 
이렇게 하나씩 꺼내
세상에 빛을 본 내 이야기들이
싱싱함을 잃지 않고 오랫동안 질리지 않기를 바라며...
오늘도 냉장고를 한껏 비워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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