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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겨찾기 Sep 29. 2019

여행의 이유 - 부다페스트와 빈

여행을 다니는 사람은 많다. 여행의 이유를 묻는 사람은 별로 없다.

 유럽에 사는 것의 최대 장점이자 목적 그 자체는 여행이라 할 수 있다. 독일 생활을 연장한 이유 중의 하나는 아직 가고 싶은 곳이 너무 많이 남았다는 것이다. 어느 때든 훌쩍 떠나서 가고 싶은 도시로 갈 수 있다. 준비할 것은 가벼운 트렁크와 열려 있는 마음밖에 없다.      


  독일의 초등학교 학사 일정은 약 두 달마다 2주간의 방학이 있고, 6주간의 여름방학이 있다. 방학 기간만 이용해도 두세 달에 한 번 정도 열흘 이상의 긴 여행을 다녀올 수 있다. 그것만 해도 우리나라와는 비교도 안 되게 많은 기간이다. 게다가 유럽에서는 국내 여행을 다니듯 자유롭게 여러 나라를 다닐 수 있다. 


 몇 년 전 존경하는 선배로부터 ‘여행은 일상으로부터의 도피다’라는 말을 듣고 놀랐던 적이 있다. 선배가 여행을 싫어한다면서 한 말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모든 사람이 여행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던 나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그 선배는 일상이 힘들거나 심심해서 여행을 가는 것이지 일상에서 충분한 만족을 느끼면 여행을 떠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 말에 반쯤 동의한다. 여행은 아무리 오래 이어진다고 해도 순간적이다. 영원히 계속되는 여행은 없다. 일상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여행에서만 즐거움을 찾는다면 그 사람의 삶은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선배는 도리어 내게 물었다.


 "여행 가서 뭐하려고?"

 

 10월 중순 가을방학을 맞아 자동차로 부다페스트와 빈을 다녀왔다. 여행의 동선은 이랬다. 노이하우스 암 인(Neuhaus am Inn) 1박, 부다페스트 4박, 빈 4박, 뉘른베르크 1박. 처음과 마지막의 1박은 한 번에 이동하기는 너무 멀어서 중간에 하루 쉬었다 가는 곳이었다. 


 이처럼 한 곳에 며칠씩 머무는 일정을 잡게 되면 많은 도시를 돌아다닐 수 있는 자동차 여행의 장점이 일부 퇴색된다. 하지만 비행기를 타는 것보다 비용이 저렴하고 마음대로 계획 세우기 편한 것은 여전한 장점이다. 자동차로 가면 쌀과 전기밥솥을 가지고 다니며 식비를 절약할 수도 있다.    

 

 노이하우스 암 인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국경에 있는 인(Inn) 강에 접한, 거의 사람이 찾지 않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처음 듣는 도시고 관광지도 아니었지만 부다페스트로 가는 길에 있어서 머물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로 넘어가기 전 물가가 싼 독일에서 먹거리와 마실 거리를 사고, 기름을 넣겠다는 목적도 있었다. 


 그 도시에 머물던 날 우리 가족은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에서 저녁을 먹었다. 5분만 걸어 짧은 다리를 건너면 오스트리아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없어서인지, 나는 국경 마을에 대한 환상이 있다. 이런 도시를 찾아 서로 다른 운명의 희미한 경계를 보는 것은 여행을 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나에게 여행은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이다. 

독일의 국경 마을에서 강 건너 오스트리아를 바라 본 모습이다. 옆에 살짝 보이는 것이 국경을 건너는 다리다.

 다음날 도착한 부다페스트는 세계 각지에서 온 젊은 여행자들로 넘쳤다. 인생 사진을 찍기 위한 카메라 플래시가 곳곳에서 터졌고 여기저기에서 연인들이 키스를 했다. 


 빈은 정말 빈이었다. <비포 선라이즈>를 왜 파리나 런던 같은 도시가 아닌 빈에서 찍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곤 했는데, 빈의 밤거리를 걸으면서 그러한 의문이 풀렸다. 아이들만 없었다면 아내와 함께 밤새도록 걷고 싶었다. 

 

  두 도시는 모두 낮보다 밤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우리는 도심의 거리 곳곳을 밤낮으로 걸어 다녔다. 내가 여행을 하는 이유는 낯선 곳을 걷기 위해서이다. 낯선 곳에는 내가 모르고 있던 내가 있어서이다.

부다페스트의 야경이다. 거리 곳곳에서 연인들을 볼 수 있다.

  빈과 부다페스트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 1세(1830~1916)와 그 황후인 엘리자베트 아말리에 오이게니(1838~1898)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뛰어난 미인이었던 엘리자베트 황후는 시시(Sisi)라는 애칭으로도 불렸다. 빈과 부다페스트의 도심에는 그들의 동상과 그들의 이름을 딴 광장과 건축물이 있으며, 어디를 가도 쉽게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엘리자베트 황후는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녀를 미워했던 시어머니의 구박과 억압적인 궁중생활, 엄격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예법과 자신을 무시하는 귀족들, 너무 바빠서 그녀에게 신경 써주지 못하는 황제. 그녀는 이런 삶의 현실을 피해 빈을 떠나 오랜 기간 유럽 각지를 여행했고 특히 많은 시간을 부다페스트에서 보냈다고 한다.  아마도 엘리자베트 황후에게 여행은 견디기 힘든 일상으로부터의 도피였던 것 같다. 


 하지만 짐작컨데, 그녀에게 여행이 도피의 의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행 그 자체에서 충분한 즐거움을 느꼈을 것이다. 도피로서의 여행은 떠나는 순간 목적을 달성한다. 목적을 달성한 여행이 계속되기는 쉽지 않다.


 설령 도피로서의 여행이라고 한들 어떠하랴. 힘든 일상을 떠나 어디론가 갈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고, 그것만으로도 여행을 하는 이유가 된다.      


 올해 여름에 그 선배가 유럽으로 가족여행을 왔다. 여행을 싫어한다고 했던 그 선배말이다. 그 선배에게 물었다.


 “형, 예전에 여행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었나요? 어쩌다가 여행을 결심한 건가요?”

 “내가 그랬었나? 지금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아. 가족들이 원하니까 오는 거야. 살다 보니 여행을 해야 될 때가 있더라. ”     


 선배가 여전히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놀랍긴 해도, 선배가 말하는 이유에는 충분히 공감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 여행을 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어떠 이유로든 여행을 갈 수 있고, 어떤 여행은 떠난 다음에 여행의 이유를 찾기도 한다.


 최근에는 “왜 여행을 가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을 들은 적이 없다. 어떤 목적을 위해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 자체가 비교 불가능한 목적이 되었다. 여행의 이유를 묻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명제에 의문을 제기하는 생뚱맞은 질문으로 취급된다. 


 해외에서 휴가를 즐기는 것은 그 사람의 능력이나 삶의 질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여행을 간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성취감을 느끼고 타인에게 자신을 과시할 수 있다. 휴가철에 사무실에 혼자 남아 있으면 뒤쳐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값싼 비행기표를 알아보고 여행 일정을 잡는 데 열중한다. 일종의 유행과 비슷하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욕망한다는 것이 여행의 이유가 되었다. 이런 마음이 여행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나는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존중한다. 낯선 곳을 힘들게 다니는 것보다 익숙한 곳에서 편하게 지내는 것에서 더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여행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 절대적으로 선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경쟁적으로 여행을 하는 사람들과 여행 이야기를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조건만 보고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과 비슷하다. 여행을 마친 그들의 가방에는 열쇠고리 모양 기념품과 반 값 할인받은 명품만이 남을 것이다.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의 인생 이야기 역시 별로 듣고 싶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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