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는 잠깐의 멈춤과 손짓이 있다.
* 실수로 글이 지워져서 다시 올립니다.
잠시 한국에 다녀온 아내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버스가 도착해서 승차하려고 하는데 아내 앞에 몸이 불편한 노인 분이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아내는 노인 분에 맞게 속도를 늦춘 후 뒤따라갔다. 그때 뒤에 있던 아주머니 한 분이 아내의 몸을 밀치면서 말했다.
“아니, 빨리 안 가고 뭐하는 거예요.”
그러더니 잽싸게 아내와 노인을 앞질러 버스에 올라타 버렸다.
아내는 순식간에 벌어진 그 일이 무척 당황스러웠다고 했다. 독일에서 산지 2년밖에 안 되었지만 이곳의 문화와 습관에 익숙해져 있음을 느꼈다고 했다. 아내의 몸은 이곳의 속도에 맞게 느려져 있었다.
아내는 한국에 있는 일주일 동안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마다 혼란스러웠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내리거나 탈 때는 찰나의 기다림만이 허용될 뿐이었다. 몸과 눈을 이리저리 놀리며 재빨리 행동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치이고 욕먹기 일쑤였다. 잠시만 외출해도 아내는 지쳤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큰 길을 따라 3-4개의 카페가 있다. 간단한 음료와 먹거리를 파는 곳이다. 독일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카페에서 테이크아웃이 되지 않아서 놀랐었다.
빵집에서 파는 커피는 테이크아웃이 되지만, 종이컵에 커피를 담아 줄뿐 대부분 뚜껑이 없다. 종이든 플라스틱이든 빨대 같은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동네에 있는 카페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다. 거리에 놓인 테이블에는 누군가가 항상 앉아 있다. 이곳 사람들에게 커피는 머그잔에 담아 천천히 마시는 것이지 들고 나가는 게 아니다.
물론 시내에 있는 카페나 빵집에서는 테이크아웃 커피를 판다. 하지만 테이크아웃 커피는 어디까지나 예외일 뿐 점심시간이나 오후 내내 죽치고 앉아서 즐기는 게 더 일반적이다.
작년 3월 2주 동안 한국에 간 적이 있다. 인천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처가댁이 있는 분당 수내역 정류장에 내렸다. 수내역 주변은 유럽의 시내에서 본 어느 곳보다 더 차도가 넓고 자동차가 많았다.
차들과 사람들은 어디론가 분주하게 왔다 갔다 했다. 정신없이 오가는 사람들과 차들 속에서 나는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흘렀다. 무릉도원에서 신선들의 바둑 구경을 하다 현실로 돌아온 나무꾼의 심정이랄까. 1년간 멈춰있던 시간의 공백이 10분 만에 메워져 버렸다. 나는 약간 현기증을 느꼈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이다.
유럽 생활이 답답하고 불편하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많다. 물건을 배송시켜도 일주일은 걸리고 싱크대가 고장 나서 고치려면 최소 2주는 필요하다. 오후 6시면 거리의 모든 빵집이 문을 닫고, 밤 10시가 넘으면 필요한 물건이 있어도 사지 못한다.
마트의 계산대에 있는 할머니는 느린 동작으로 지갑을 열어 동전과 지폐를 꺼내고, 점원은 일일이 세어 거스름돈을 내어준다. 음식점에 들어가면 웨이터가 와서 물어볼 때까지 문 앞에 서서 기다린다. 웨이터가 오지 않으면 그저 계속 기다린다. 뒤로 길게 줄이 늘어서도 다들 조용히 차례를 기다린다.
5G는커녕 3G 인터넷 통신도 잘 되지 않아서 도시 외곽에서는 인터넷 연결이 안 된다. 건물 지하나 큰 마트에 깊숙이 들어가기만 해도 인터넷을 할 수 없다.
공중 화장실은 거의 없으며 필요한 경우 유료 화장실을 이용해야 한다. 지하철이나 백화점에도 공짜로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은 거의 없다. 간혹 무료인 곳이 있는데, 그러한 곳은 그만큼 지저분하고 악취가 심하다.
이런 것들이 조금 늦어진다고 해도 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다음날 필요한 물건을 사고, 화장실에서 설거지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와이파이로 인터넷을 하면 된다. 밥을 조금 늦게 먹어도 굶어죽지 않는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돈이 아까우면 참을 수 있는 데까지 참고, 정녕 못 참겠으면 돈을 내면 된다.
하루 이틀, 일주일 이주일의 불편함을 참으면 된다. 시간이 필요하고, 기다리면 결국 해결될 문제들이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불편함을 참고 기다릴 여유가 없다.
사실 여유가 없는 정도가 아니다. 가능한 쾌적하고 빠르고 안락한 서비스를 받는 것이 당연한 권리라고 여긴다. 그런 서비스를 받지 못하면 능력이 없는 것이고, 무시당하는 것이고, 차별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다림은 곧 멍청함이다. 여유는 경제적인 넉넉함을 의미할 뿐 삶의 태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바쁘고 일사분란 한 것은 능력 있음의 상징이다.
우리가 누리는 빠르고 쾌적한 서비스는 누군가의 희생을 원료로 한다. 새벽부터 출근해서 물건을 분류하고 배달하는 사람들, 하루에 몇 번씩 화장실을 청소하고 화장실에서 쉬어야 하는 사람들, 손님들에게 욕 먹어가면서 한 시도 쉴 틈 없이 움직여야 하는 사람들.
우리의 편리함은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갈아 넣어야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누릴 수 있는 온갖 서비스와 고객으로서의 혜택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갈아 넣고 있는 사람들 덕분이다.
한국은 소비자가 왕이지만, 독일은 일하는 사람, 근로자가 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비자인 동시에 근로자이다.
서로가 서로의 갈아 넣은 노동력에 의존하여 보다 나은 편리함과 신속함을 누릴 것인지, 조금 불편해도 서로에게 더 많은 여유를 허용하면서 자신도 여유를 찾을 것인지의 문제이다.
독일의 골목길에도 차가 많다. 길을 걷다 보면 자동차와 계속 마주친다. 대부분의 독일 사람들은 차를 멈추고 먼저 가라는 손짓을 한다. 나 역시 고맙다고 손짓을 하고 가던 길을 간다.
정말 작은 멈춤이지만 그때마다 나는 그들의 멈출 수 있음에 대해 생각한다. 차와 사람이 같이 다니는 골목길에서 차를 운전하다 사람을 발견했을 때 브레이크를 밟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단순히 속도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아예 멈춘다. 그 다음 기다린다. - 한국에서 이랬다가는 뒤차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설령 2차선의 차도라 해도 보행자 우선구역 표시가 되어 있으면 브레이크를 밟는다. 신호등 없이 보행자 우선구역 표시만 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떤 때는 짧은 구간에서 자주 멈춰야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골목길에서 멈추는 것에는 조금 익숙해졌지만, 차도에 있는 보행자 우선구역 표시에서 멈추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다. 달리던 속도를 줄이려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서이다.
독일 사람들은 – 대부분의 유럽 사람들은 – 사람과 관계된 일이면 얼마든지 기다릴 줄 안다. 지하철을 타다 걸음이 불편한 노인이 있으면 멈추고, 자동차를 운전하다 길을 가던 행인을 발견하면 멈춘다.
그리고 눈을 마주치며 손짓한다. 나는 괜찮으니, 먼저 가세요라고 손짓한다. 만약 급한 일이 있어 멈추지 않고 지나치는 경우라면 미안하다고 손짓한다. 나도 마찬가지로 고맙다거나 괜찮다고 손짓으로 인사한다. 그렇게 의사소통하고 배려한다. 조금 과장하면 그 사람과 내가 하나의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각자도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멈춤과 손짓은 여유에서 나온다. 독일에는 있지만 한국에는 없는 것이다. 왜 우리나라에는 그런 여유가 없는지, 상대방을 배려하는 멈춤과 손짓이 없는지, 잠깐이라도 멈출 때면 뒷사람에게 떠밀려야 하는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