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yers of Fear (2023)
M3 맥북에어에서 가능한 것만 합니다. 컨트롤러로만 합니다. 싱글 플레이만 합니다.
|타이틀| 레이어스 오브 피어 (Layers of Fear)
|최초출시일| 2023년 6월 15일
|개발사| Bloober Team
|유통사| Bloober Team
|구입처| 스팀
|사용기기| M3 맥북 에어, 듀얼센스
<레이어스 오브 피어(Layers of Fear, 2023)>는 2016년에 나온 <레이어스 오브 피어>와 2019년에 나온 <레이어스 오브 피어 2(Layers of Fear 2)>의 리메이크에 가까운 무엇입니다. 기존의 두 게임과 DLC의 그래픽과 연출을 다듬고, 이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새로운 컨텐츠를 추가해 하나로 패키지로 만든 것입니다. 언리얼 엔진 5를 이용해 그래픽을 일신하고 레이 트레이싱 효과까지 넣어서… 어떻다고는 하는데 저는 예전 두 작품을 해본 적도 없고 언리얼 엔진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으니 사실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그저 공포 게임으로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어서 해보고 싶었지요.
예전 글에서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레이어스 오브 피어>는 잠깐 하다가 말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픽과 사운드는 훌륭하지만 초반에 느껴지는 흡인력이 별로 없다 보니 짤막하게 조금씩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은 게임이라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짧게나마 체험했던 멋진 그래픽과 사운드를 그냥 내버려 두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다시 시도를 해봤는데요, 틈틈이 계속하다 보니 어느새 <레이어스 오브 피어>의 시청각적 경험이 만들어내는 깊고 진한 분위기, 성우들의 훌륭한 연기, 그리고 비극적인 이야기의 매력에 흠뻑 빠져버렸습니다.
특히 빛과 어둠, 좁은 공간을 이용한 다양한 연출과 사실적인 표현이 정말 훌륭했고, 음향 효과 역시 놀라울 만큼 사실적이었습니다. 감정이 듬뿍 담긴 성우들의 목소리 연기 역시 실감이 났고요. 여기에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공간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몽환적 체험이 어우러지면서 다른 게임에서는 겪을 수 없었던 경험을 만들어냈습니다.
1부 화가 이야기는 지나친 예술욕에 휘말려 아내를 잃고 딸까지 잃을 위기에 처한 몰락한 화가가 현실인지 망상인지 알 수 없는 저택 내부를 돌아다니며 마지막 걸작을 완성하기 위한 재료를 찾아다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지나온 과거와 죽은 아내의 망령에 시달리게 되고요.
2부 배우 이야기는 혼란스러운 과거를 가진 배우가 왠지 기시감이 드는 배에서 정체불명의 감독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며 자신의 과거와 정체를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과거와 정체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깨닫게 되고, 모든 것을 마무리하기 위한 선택의 순간에 점차 다가서게 됩니다.
1부 화가 이야기와 2부 배우 이야기 모두 기본적인 스타일을 공유하면서도 전혀 다른 종류의 생생한 악몽처럼 다가오는데요, 여기에 앞에서 말한 것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압박감을 주는 요소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겁고 진한 공포감을 잔뜩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최소한의 긴박감을 제공하기 위해 등장하는 '아내의 원혼'과 '형체가 없는 존재'는 처음 몇 번 등장할 때는 무섭지만 반복해서 나올 때는 그냥 귀찮은 존재로 여겨지더라고요. 다음 챕터로 넘어가야 하니 빨리 도망이나 가라, 라는 느낌으로요. 다만 '아내의 원혼'은 무사히 도망쳤을 때 남기는 말들이 서글프게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이건 뒤에서 언급할 아내의 이야기를 담은 DLC와 이어지면서 더욱 큰 인상을 남기게 되었고요.
조작이 조금 불편한 감이 있었는데, 문을 열고 닫는 동작이 까다롭다는 특징과 엮이면서 처음엔 단점으로 다가왔었습니다. 하지만 설정에서 컨트롤러의 버튼 설정을 바꾸니(*), 오히려 그런 조작이 물리적인 몰입감을 증폭해 줘서 더 좋더라고요. 왜 처음부터 이렇게 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 *: 상호작용을 R1(RB)으로, 달리기를 L1(LB)으로)
이제 각 파트에 대해서 짧게 이야기해 보지요.
화가는 조금은 전형적인 캐릭터입니다. 자신의 재능과 욕망에 도취되어 너무 먼 목표만 바라보다가 가까이 있던 소중한 것을 미처 지켜내지 못하고, 그것들을 잃은 다음에는 막심한 후회와 죄책감에 휩싸이며 이성을 잃게 되는 인물이지요. 천재를 다루는 이야기에서 흔치는 않지만 드물지도 않게 등장하는 종류입니다. 하지만 이 인물의 복잡한 내면을 보여주는 방법이 이야기로서도 게임으로서도 아주 독특하고 신선하며 괴기스럽기도 했기 때문에 굉장히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중증 나르시시스트에 자기중심적인 인물이라는 게 처음부터 드러나기 때문에 다른 매체였다면 감정이입이 쉽지 않았겠지만, 사용자의 행위성을 이끌어내는 게임이라는 매체의 특성과 효과적인 연출들이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저도 후반부에서는 화가의 감정과 심리에 몰입하면서 굉장히 고양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화가는 한때 재능을 인정받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점차 주류에서 벗어나기 시작하고 곧 인기도 떨어집니다. 그런 와중에 아내가 백화점 화재로 큰 화상을 입게 됩니다. 아내 역시 재능 있는 음악가였는데, 이 사고로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되자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어하게 되고요. 사랑하는 딸에게서는 아쉽게도 그림의 재능이 보이지 않을뿐더러, 아이의 산만함에 작업 능률까지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방에 틀어박히게 되고 가족과는 편지를 통해서만 소통하게 됩니다. 이 선택은 결국 아내를 극도의 외로움으로 밀어 넣고, 망상과 극단적 행동을 반복하게 만듭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이 화가에게 세 가지 결말을 준비해 두고 있습니다. 아내와 딸을 잃는 비극 속에서도 모든 죄책감을 외면하며 이윽고 걸작을 완성해 자신을 무시했던 모두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지막 캔버스에 사랑하는 아내와 딸의 그림을 담아내며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뼈아픈 후회 속에서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과거를 수용하지도 회피하지도 못하며 완성될 수 없는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저택을 맴도는 거고요. 이후에 나온 DLC는 이 세 번째 결말과 이어진다고 하니 이게 일종의 정사(正史)라고 할 수 있겠네요. 게임에서 정사가 그리 중요한 건 아니지만요.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결말이 보고 싶었는데, 결국 세 번째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주인공이 화가인 만큼, 게임 속에서 굉장히 많은 미술 작품이 등장합니다. 대부분 실존하는 작품인 만큼 다양한 그림을 감상하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허구의 작품이 섞여 있거나 실존 작품의 내용이 변형되어 있을 때가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어디서 어디까지가 현실의 작품인지 혼란스러워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그림을 활용한 퍼즐과 연출도 재미있었고요.
화가의 이야기는 조금 지나치게 파편적이라는 느낌이 있어서, 중반부를 지난 다음에야 본격적인 흡인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반부에서는 이런저런 행위가 요구되더라도 이걸 왜 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고요. 아마 그래서 처음 시작했을 때는 오래 이어가지 못했겠지요.
하지만 화가 아내의 감정선은 좋았습니다. 시계열이 조금 꼬여있기는 하지만, 편지를 통해 드러나는 아내의 감정이 흔들리고 변하가는 과정은 목소리 연기와 함께 진한 여운을 남겼어요. 아내의 이야기는 DLC에서 더 이어집니다.
화가 아버지와 강제로 분리되어 따로 자라서 마침내 성인이 된 딸의 이야기입니다. 본편에서 담아내지 못했던 화가 아버지와 음악가 어머니의 에피소드를 담아내고 있는데, 딸 본인의 서사는 별로 없다 보니 딸이라는 캐릭터가 약간 소품처럼 소비된 느낌입니다. 본편에서 했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기도 해서 새로운 느낌도 별로 없었고요. <에디스 핀치의 유산>처럼 과거의 비극을 쫓아가는 느낌을 기대했는데, 조금 아쉬웠습니다. 여기서도 세 가지 엔딩이 있는데, 저는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는 걸 선택했습니다. 다른 두 엔딩이 이야기로서는 더 재미있어 보였지만, 딸의 감정에 이입을 하기가 어려웠다 보니 굳이 그런 엔딩을 찾아갈 동력이 좀 부족했던 것 같네요.
본편보다 훨씬 짧았지만, 개인적으로는 본편보다 더 만족스러웠습니다. 본편에서 화가의 아내는 주인공의 광기 어린 욕망에 삶을 빼앗긴 안타까운 희생자이자 화가의 죄책감에서 탄생한 유령으로 나올 때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노트>는 본편에서는 알 수 없었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남편처럼 역시 재능 있는 예술가이자 음악가였던 그의 삶과 감정, 선택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듭니다. 자유와 재능, 가족과 희생 사이에서 고뇌하던 음악가는 쓰라린 선택의 순간들을 연이어 마주하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의 조언들은 도리어 그 선택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기만 할 뿐이고요.
음악가가 맞이할 비극적인 결말은 본편을 통해 이미 결정되어 있지만, 게임이라는 매체는 여기에 멀티 엔딩이라는 다른 결을 추가해 줄 수 있지요. <마지막 노트>에서 플레이어는 음악가의 시선에서 조금씩 다른 선택을 하며 정사와는 다른 결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저는 멀티 엔딩이 있을 땐 가급적 정사에 가까운 걸 먼저 고르려고 합니다. 하지만 본편 때부터 주인공 화가보다 아내인 음악가의 감정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기에, <마지막 노트>에서는 그에게 좋은 결말을 주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했습니다. 다행히 그런 엔딩을 맞이하는 데 성공했고요.
한때 가졌던 완벽함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사람들이 원하는 역할로 나를 묶어두지 않을 거야.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내 영혼을 망가뜨리지 않을 거야.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야.
난 흉해.
난 불구자야
난 쓸모없어.
난 자유로워.
2부에서는 배경이 저택에서 여객선으로 바뀌지만, 기본적으로는 1부와 같은 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배경이 되는 공간 곳곳을 돌아다니며 왜곡과 환각 속에서 과거에 대한 단서를 찾아가는 거지요. 사물과 상호작용하는 방법을 포함인 매카닉(맞는 표현인지 모르겠지만)도 거의 동일합니다. 램프는 손전등으로 바뀌었고, 그림 대신 영화 필름이나 포스터를 모아야 하고, 아내의 유령 대신 형체 없는 존재가 쫓아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훨씬 복잡합니다. 1부에서는 지나친 욕망에 가족을 잃은 화가의 비극이라는 단순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었던 반면, 2부는 전체 줄거리를 쉽게 요약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서사적 요소들을 품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재능을 인정받고 있는 어느 배우입니다. 어떤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배에 올라탔는데, 그 배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껴요.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배우는 기묘하게 생긴 마네킹들과 함께 배에 혼자 남게 됩니다. 그리고 어딘가 수상한 감독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며 자꾸 이런저런 지시를 합니다. 그 지시를 따를지 따르지 않을지는 배우, 그러니까 플레이어의 선택이고요.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가 조금씩 드러납니다. 배우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으면서 죽었기 때문인 것 같고요. 그리고 아버지의 학대는 배우의 누나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두 아이는 함께 집을 떠나고, 마침 정박해 있던 배에 올라탑니다. 그렇게 소년 제임스와 소녀 릴리는 밀항을 하게 됩니다.
승무원들은 곧 밀항자가 있다는 걸 알아냅니다. 그래서 감시를 강화하고 식량 배급을 제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고요. 누나 릴리는 아직 어린 동생을 안심시키기 위해 마치 해적 놀이를 하는 것처럼 꾸미며 배 곳곳을 돌아다닙니다. 마침 릴리의 꿈이 배우이기도 했다 보니, 릴리는 정말 진심을 다해 연기합니다. 하지만 릴리 역시 어린아이이다 보니, 연기에 지나치게 몰입해 제임스를 몰아붙이기도 하지만요.
"이제부터 나는... 바다의 검은 방랑자, 베인스 선장이다!
“하지만... 베인스 선장은 여자가 아니잖아.”
“그 입 다물라, 갑판수! 난 내가 선택하는 누구든지 될 수 있어! 네 옹졸한 마음이 그걸 반대한다면, 같이 바다에 뛰어들거라!”
그러던 어느 날, 배에서 사고로 폭발과 화재가 발생합니다. 그 사고로 릴리는 제임스에게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넌 할 수 있어. 넌 강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다고. 우린 다시 만날 거야!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르겠지만 널 찾을 거야! 내가..."
제임스는 구조된 이후로도 누나 릴리를 사무치도록 그리워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제임스에게 누나를 찾을 수 있게 도와주겠다며 어떤 존재가 찾아옵니다.
"릴리… 제발, 돌아와… 네가 필요해."
"…"
"어… 안녕?"
"..."
"난… 제임스야. 네 이름은 뭐야?
"..."
"하. 재밌는 이름이네.
"..."
"누나 찾는 걸 도와줄 수 있어?"
즉, 2부의 이야기는 배우가 된 제임스가 어째서인지 누나와 마지막으로 함께 시간을 보냈던 배(와 비슷한 배)에 다시 올라타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주인공이 '배우'라는 것입니다. 배우라는 직업이 하나의 몸에 다양한 정체성을 품고 표현해 내는 것이듯, 플레이어는 존재할 리 없는 배 위에서 감독의 지시를 받으며 '연기'를 하고 있는 주인공이 정말 제임스인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게임을 진행하다 보면, 혹시 릴리가 주인공인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결국은 나가는 방법을 알아냈다. 바로 나의 내면이다. 나 자신. 당신. 당신은 누구?
과거와 현재를 오고 가며 현실 공간과 몽환적 공간이 뒤섞이는 과정 속에서, 플레이어에게 주어진 임무는 '배우'의 정체성을 찾는 것입니다. 배우의 내면에 제임스의 모습도, 릴리의 모습도 있습니다. 하지만 배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둘 중 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배우의 몸속에 든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아야 하는 거죠.
마지막 무대에 서는 배우는 제임스일까, 릴리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일까. 그리고 마지막에 밝혀지는 배우의 정체성은 감독의 지시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따라 달라집니다.
1부 화가의 이야기가 기본적으로는 거대한 저택 내부에서만 진행되었다 보니 다양한 연출을 곁들였다고는 해도 비슷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던 반면, 2부 배우의 이야기에서는 좁지만 많은 종류의 공간이 모여있는 배라는 배경을 이용해 이질적인 공간을 계속해서 보여줍니다. 또 영화의 세트장도 곳곳에 있어서 색다른 체험도 가능했고요. 타이타닉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가, 어느 순간 비현실적인 거대 증기기관실로 들어가고, 정신을 차리고 보면 영화 <샤이닝>에 나오는 오버룩 호텔을 연상시키는 기묘한 복도를 걷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공간 곳곳에 이미 그 자체로 으스스한 마네킹들이 곳곳에 기괴한 자세로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고요.
영화가 주요 소재인 만큼, 다양한 명작 영화들에 대한 오마주를 찾아보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조르주 멜리에스의 <달세계 여행>을 흉내 낸 장면도 있었고,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에 나오는 호텔의 복도를 그대로 담은 비밀 공간,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나오는 하얀 방과 검은 모노리스를 떠올리게 하는 공간, 데이비드 핀처의 <세븐>을 흉내낸 마네킹도 있었습니다. 이보다 더 많았던 것 같은데 전부 기억이 나지는 않네요.
2부는 1부에 비해 복합적인 플롯과 다양한 변곡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로서는 굉장히 재미있고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게임 자체가 파편적으로 흩어진 이야기를 조금씩 모아가며 과거의 사건을 추리해 나가는 형식인 만큼, 전체적인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그려내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네요. 1부에서도 이야기가 너무 파편적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럼에도 핵심적인 플롯은 비교적 단순한 편이라서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반면, 2부는 여러 인물이 각자의 사정을 가지고 이야기에 개입하고, 반전도 여러 차례 있다 보니 파편적 스토리텔링이 좀 불편하게 다가왔던 것 같네요.
게다가 1부가 다양한 주제를 '그림'으로 보여주는 방법을 사용했다면, 2부는 메시지 전달을 전달할 때 난해한 문학적 은유와 초현실적 시각 예술에 크게 의존을 하다 보니 전체적인 맥락을 따라가기가 더 어려웠고요. 배우와 감독이라는 직업, 영화라는 예술 매체를 발판 삼아 필멸과 불멸에 대한 이야기도 늘어놓는데, 이게 릴리&제임스의 이야기와 잘 엮이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대충 어떤 맥락에서 나오는 말인지는 알겠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가,라는 생각이 자주 들더라고요. 너무 많은 걸 담아내려다 이도저도 아닌 게 되어버린 건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우린 영원히 살아갈 운명이었어.
난 영원히 존재할 거야.
그렇게 될 거라고!
내가 해낼 거야!
아쉬운 점은 있었지만 2부 역시 만족스럽기는 했습니다. 1부보다는 좀 더 다채로운 경험이 가능했다 보니, 두 본편 중 하나만 다시 플레이해야 한다면 2부 배우 이야기를 고를 것 같네요.
참고로 저는 '배우'의 정체가 릴리였다는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제임스가 결국 자신을 구해줬던 누나에게 자신의 몸과 삶을 양보한 거죠. 제가 원했던 결말이기도 하고요.
아마도 2부 본편에서 릴리에게 지시를 내렸던 감독의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확실하지는 않고요. 본편에서 감독은 이미 인간이 아닌 무언가가 되어버린 것 같았는데, <마지막 프롤로그>에서는 (아마도)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가 담겨 있습니다. 단, 과거가 그대로 담겨 있는 건 아니고, 이미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감독이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형식입니다. 그래서 감독을 제외한 모든 인물들이 마네킹입니다. 그들은 감독이 조명을 비추거나 액션을 외칠 때마다 기괴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연기를 하고요.
한때 유명한 '스타'였던 배우가 감독이 되어 어떤 영화를 제작하려고 했지만 미완성 대본만 남기고 사망합니다. 이후 '스타'의 딸이 주인공 감독과 함께 이 대본을 영화로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이 DLC 주된 이야기이고요.
그런데 대본의 내용이 좀 이상해요. 주인공 감독은 '스타'가 무언가에 대해 경고하려고 대본을 쓴 것 같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스타'의 딸은 미완성 대본을 자기가 완성만 시키겠다고 해놓고 많은 부분의 내용을 자꾸 바꾸려고 합니다. 하지만 감독에게 그런 수정은 '스타'가 대본 속에 남긴 경고를 지워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언쟁을 벌이던 와중에 제작 현장에서 살인 사건까지 발생하고요. 그럼에도 감독은 영화를 완성해야만 합니다.
전체적인 맥락으로 짐작해 보면, '스타'는 과거에 뒤에서 설명할 쥐 여왕과 접촉했었고, 쥐 여왕의 위험성에 대해 알리기 위해 처음 대본을 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를 완성하기 전에 사망했고요. 이후 쥐 여왕은 '스타'의 딸을 통해 주인공 감독에게 접근하고, 대본을 수정해 영화의 제작을 의뢰합니다. 그리고 감독은 '스타'의 딸의 입을 빌린 쥐 여왕의 지시대로 원래 담긴 경고를 지우고 단순히 자극적인 오락물로 만들지, 아니면 '스타'의 원래 의도대로 만들지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되고요. 그리고 이 선택에 따라 역시 결말도 달라집니다.
본편으로 이어질 걸 생각하면 정사는 쥐 여왕의 뜻대로 영화를 만들고 감독이 완전히 타락해 버리는 결말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쥐 여왕의 마수에 빠진 감독이 본편에서는 '배우'에게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거고요.
어쩌다 보니 저는 이걸 2부 본편보다 먼저 플레이를 해버렸고, 그래서 내용을 이해하는데 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스타'의 딸이 본편 주인공인 줄 알았다가, 혹시 어딘가에 본편의 배우가 있는 건 아닐까 찾아보기도 했네요. 일단 한 번 시작하면 되돌아갈 수가 없더라고요. 모든 사람이 마네킹으로 대체된 음산한 세트장이라는 배경이나 대본에 따라 세트를 준비하고 촬영을 한다는 진행이 독특했던 만큼, 본편을 먼저 끝내고 플레이를 했더라면 좀 더 몰입을 할 수 있었을 건데-라는 아쉬움이 조금 남네요.
게임을 시작하면 어느 중년 여성 작가가 외딴섬에 있는 등대를 방문하는 장면이 잠깐 나옵니다. 이 등대와 관련된 어떤 어두운 과거가 있는 것 같은데, 그 과거의 굴레를 끝내버리겠다는 의지로 가득 차 있어요. 작가는 1부와 2부 사이, 그리고 2부 이후에 다시 한번 등장하는데, 등대를 돌아다니다 보면 1부와 2부에서 나왔던 물건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작가는 1부와 2부에서 있었던 사건들과 어떤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는 거죠.
사실 이 작가는 오래전, 1부에 나온 화가의 이야기를 글로 써서 어떤 에이전시(the Agency)가 진행한 콘테스트에서 우승을 했었습니다. 그걸 계기로 에이전시가 제공하는 공간엔 등대에서 새로운 작품을 쓰겠다고 자원을 했었고요.
그런데 등대의 작업은 순조롭지가 않았어요. '작가의 벽(Writher's Block)'에 부딪힌 거죠. 그때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 쥐 여왕이 나타나 작가에게 접근해 옵니다. 걸작을 만들 수 있게 도와주겠다면서요. 창작에 어려움을 겪던 작가는 그 존재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등대에서 쓴 새로운 이야기는 대성공을 거두고 나중에 영화로 각색되었는데, 그게 바로 2부에 나온 배우가 촬영하던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몇 년 뒤, 쥐 여왕은 성공의 대가로 작가의 아들을 잡아가버린 듯합니다. 에이전시가 쥐 여왕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작가는 다시 등대를 방문합니다. 쥐 여왕에게 맞서 아들을 되찾으려고 하지만, 에이전시는 그건 불가능하다며 작가에게 경고를 합니다.
작가는 쥐 여왕의 힘을 빌리지 않고 걸작을 완성하면 아들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실패한 것 같네요. 저택 안을 영원히 맴도는 화가처럼, 여객선 안을 영원히 맴도는 배우처럼, 화가도 결국 등대에 영원이 갇혀버린 듯한 모습으로 게임은 마무리됩니다.
1부와 2부의 이야기를 이어 주기 위해 들어간 이야기이고 설정도 제법 흥미롭기는 합니다. '쥐 여왕'이라는 악의로 가득 찬 초월적 존재가 있고, 쥐 여왕을 따르는 조직인 에이전시가 있다거나 하는 설정은 더 많은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들고요.
하지만 작가의 이야기는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은 느낌이 많았습니다. 애초에 1부와 2부의 긴 플레이타임 사이사이에 끼어 있어서 몰입도 어려웠고요. 플레이한다는 느낌도 거의 들지 않아 그냥 1부와 2부, DLC를 플레이하기 위한 조금 과한 인터렉티브 메뉴라는 인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DLC에도 멀티 엔딩이 있었는데, 정작 전체 이야기를 묶어주는 작가 이야기는 좀 단출하다는 느낌이 들 만큼 짤막한 엔딩 하나만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도 좀 아쉽네요.
쥐 여왕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흥미로운 캐릭터였습니다. DLC를 포함한 게임의 모든 스토리의 배후에 있는 존재지만,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은 거의 없습니다. 1부와 2부는 사실 거의 관계가 없는 이야기라는 걸 생각하면, 쥐 여왕은 고뇌에 빠진 창작자와 예술가를 절망과 비극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걸 마치 취미처럼 즐기는 존재 같기도 합니다. 화가와 음악가, 배우와 감독, 작가 모두 그런 쥐 여왕의 콜렉션에 불과했던 거죠. 쥐 여왕의 기원이 무엇인지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래서 더 신비롭기도 합니다. 이런 쥐 여왕을 따르는 조직 에이전시가 있다는 것도 재미있고요. <그것>의 페니와이즈처럼 오직 사적 욕구를 위해 인간 세계에 개입하는 우주적 존재가 아닐까라는 상상도 해봤습니다.
쥐 여왕의 그림은 게임 곳곳에 등장하는데, 처음 1부 본편을 플레이할 때는 화상을 입은 화상을 입은 아내의 모습인가 했습니다. 다행히 아니었고요. 알고 보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흰 족제비를 안은 여인"을 변형한 그림이더군요.
<레이어스 오브 피어>는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더라도 굉장히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는데요, 그래도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건 번역입니다.
그냥 구글 번역기를 돌린 것 같은 부분이 너무 많았어요.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많아진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번역 담당자가 작업 중에 지쳐버렸던 걸까요? 그렇지 않아도 파편적인 스토리텔링 때문에 따라가기가 쉽지 않은데, 상황이나 맥락에 전혀 맞지 않은 대사나 문장이 계속 나와서 답답할 때가 많았습니다. 어떤 부분은 원문을 찾아보고 나서야 무슨 말인지 그나마 이해를 할 수 있었고요.
예를 들어,
원문
A: You had to know he was ill. and you enabled him. Encouraged his delusions!
B: I trusted his vision!
A: You trusted his madness!
게임 속 번역
A: 그가 아프단 걸 알았어야지. 그런데 망상까지 하도록 부추겼어!
B: 그의 안목을 믿길 잘했어!
A: 그의 광기를 믿었어야지!
문맥을 고려한 번역(예시)
A: 그분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야죠. 그런데 도리어 망상을 부추기까지 했다니!
B: 전 그분의 안목을 믿었어요!
A: 그분의 광기를 믿은 거겠죠!
원문
A: You changed the script. You said you would just finish it.
B: It was an unpolished draft. He was my father. I know what he wanted to say.
게임 속 번역
A: 대본을 바꿨잖아. 그냥 끝낼 거라며.
B: 이건 다듬지 않은 초안이다. 내 아버지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알고 있다.
문맥을 고려한 번역(예시)
A: 당신, 대본을 고쳤군요. 그냥 마무리만 지을 거라면서요.
B: 그건 아직 손을 덜 본 초고였으니까요. 그분은 제 아버지였잖아요.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으셨는지는 제가 알아요.
이런 부분이 굉장히, 특히 2부에 많이 있었습니다. 스토리에도 굉장히 많은 공을 들인 티가 나는 작품이었던 만큼, 이런 성의 없는 번역은 많이 아쉬웠습니다.
<레이어스 오브 피어>를 끝낸 건 12월 초, 그러니까 두 달 이상 지났습니다. 연말부터 최근까지 너무 일이 많아서 사적인 글을 쓸 여유가 없었어요. 게임도 거의 손을 대지 못했고요. 이번 주에 큰 일 하나의 중간 단계가 좀 정리가 되었다 보니, 기분 전환 삼아 오랜만에 게임로그를 써봤습니다. 당장 오늘부터 또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 해서 이 다음이 언제가 될지는 또 모르겠네요.
올해에는 작가일은 좀 줄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감당이 되지 않을 만큼 욕심을 부린 덕분에 너무 바쁘게 보냈던 것 같아요. 마음이 바쁠수록 생산성도 떨어지는 악순환에 빠지기도 했고요. 일단 작년에 벌여놓은 일들을 수습하는데만 올해 봄까지는 걸릴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는 게임도 게임로그도 좀 드문드문하겠지요. 여름쯤 되면 조금 마음 편하게 영화든 책이든 게임이든 즐길 수 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