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재생의 진짜 의미.
최근, 을지로 세운지구 재개발 소식이 전해지면서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을지로의 상인들 뿐 아니라 을지로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고 집회까지 벌이고 있다.
재개발, 도시환경을 정비한다고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도시의 모습을 지우는 결과를 낳는다.
도시는 그냥 골목, 그냥 길, 그냥 건물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도시에는 사람이 살고, 그 사람들 사이에는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가 쌓여 흐름을 만들고 역사를 만든다.
사람들이 오래 머물었던 곳일수록 도시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켜켜이, 촘촘하게, 유기적으로 얽혀있다.
사실 나도 재개발, 도시재생이라 하면 다 허물어버리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서울시의 재개발 사업은 마찰없이 진행된 적이 없었는데, 대표적으로 안타까운 예가 피맛골이 아닐까 싶다.
조선시대부터 근현대까지의 기억을 품고 있는 골목길을 밀어버리고 거대한 오피스텔이 들어섰으니.
돈의문 뉴타운의 재개발은 그런 피맛골을 반면교사 삼아 진행되었다.
서대문역에서 광화문 방향으로 조금 걸어 올라가면 강북삼성병원 맞은편에 보이는 돈의문 박물관마을.
아직까지 크리스마스의 여운을 간직한 중앙광장.
쌀쌀한 날씨 탓일까, 평일 낮 시간이어서일까 돈의문 박물관마을은 무척 한적했다.
사실 큰 정보없이 방문했었는데,
새로 정비한 집들은 산속 어딘가의 유원지를 떠올리게 했다.
내 눈길을 끌었던 건 플라스틱 블럭 안에 담긴 여러 소품들.
안에 담긴 것들은 특별한 것들이 아니라 그냥, 옆에 있는 것들이다.
단추, 나사, 스트링, 가위, 구슬, 블럭 등등...
벽 뿐 아니라 바닥에도 이런 블럭들이 박혀있었다.
COMMON and the COMMONS
…작품을 통해 페이빙 블록의 재료가 된 생활 속 작은 물건은 박물관 마을 곳곳 10개의 장소로 흩어져
도시의 일부가 되고 사람들과 공유되며 다시 기억되거나, 또 잊혀지거나, 새로운 이야기로 치환될 예정입니다.
이를 통해서 도시라는 장소가 과거와 현재, 미래의 작은 기억들로 연결되고
켜켜이 시간과 이야기가 쌓여 공동의 장소성을 회복하길 기대해 봅니다.
생활 오브제가 이야기를 만들고 사람들과 공유되고 새로운 이야기가 되고...
이 흐름이 참 좋다. 도시 속에 있던 것을 재정렬하여 새로운 소재를 만들고 다시 이야기가 되고
그 이야기는 도시가 되고 역사가 되는, 그 흐름.
나는 오래 되거나, 음 뭔가 톤다운된 느낌을 좋아하는데
그런 나에게 겨울의 돈의문 박물관마을은 그야말로 취향저격이었다.
'깔끔하게 지어진 건물에 비해 담벼락은 좀 꼬질꼬질하네.'라고 생각할 찰나 기둥에 붙은 사진과 글귀가 눈에 띄었다.
그냥 좀 좋아보이는 이층집은 사실 한옥의 발전과정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건축물이었고(!!!)
그래서 노후된 것들만 교체하여 그대로 보존했다고.
이외에도 공간 곳곳에 재개발 전의 모습이 보존된 벽이나 기둥, 건물 등을 볼 수 있다.
나에게는 이런 곳이 굉장한 입덕포인트였다. (돌아다니는 내내 "너무 좋다..."를 연발함.)
이런 것이 골목의 기억이니까.
(서대문여관 건물 내부에는 실제로 숙박에 사용되었던 객실들이 다양한 셀의 형태로 존재하며
예술 협업과 전시, 플리마켓 등을 진행한다..... 고 돈의문 박물관마을 홈페이지 http://dmvillage.info/index.html 에서 봤다.. 들어가볼걸....)
1960년대 이후 인근 지역의 개발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돈의문 지역은 개발에서 소외되었다. 그 대신 오래된 단독주택들은 식당, 카페, 여관, 고시원 등으로 바뀌면서 서민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하고 잠자리가 되어주는 서민들의 터전이었다. 토방, 미르, 한정 등 서민 한정식집, 직장인들의 단골 식당이었던 문화칼국수, 풍미추어탕, 연인들의 데이트코스였던 아지오와 비스. 공간 하나하나가 지난 100여년의 도시의 흐름을 그대로 품고있는, 그야말로 유물이었다.
돈의문 박물관 마을은 전시관을 통해 이러한 과거들을 디테일하게 전달하고 있다. 전시관의 명칭은 한정, 아지오 등 그 시절 음식점의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
전시관이라고 해서 지루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열...!
개꿀잼 핵꿀잼;;;;;
돈의문의 역사부터 주변 역사유적까지, 주변의 역사들을 잘 옮겨놓았다.
한정의 옆 건물 아지오로 넘어가면
아지오에 있었던 테이블과 의자, 소품들을 일부 옮겨두었는데
사진 우측에 보이는 배나온 요리사 아저씨가 바로 그것.
지루할 것 같았던 전시관, 2층의 중앙에 설치된 홍파동 골목모형.
개발 전의 홍파동을 실제로 실측해서 그대로 옮겨둔 마을모형이다.
실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디테일.
건물의 외형부터 창문, 옥상, 거리의 높낮이, 가로등에 이르기 까지 정말 한땀한땀,
건물 뿐 아니라 옥상의 화분, 골목의 풍경까지도.
그냥 건물만 미니어쳐로 만들어둔 것이 아니라
인형들로 풍경을 살려 홍파동의 생활모습 그대로를 옮겨 놓았다.
애주가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한 대성집.
이 날, 독립문과 서대문을 돌아본 뒤에 마지막 코스로 대성집을 갈 예정이었는데
이렇게 먼저 모형으로 마주하니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골목모형과 프로젝트 영상을 보며 '도시재생은 이런 것이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생각했다.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밟고 있는 바닥의 역사를 알겠구나.
아지오 전시관에서는 동네의 모습을 회기하고 있다면, 한정 전시관에서는 동네의 문화를 회기하고 있다.
...
그런데 사진을 안 찍어옴...
말로 설명하자면... 이 동네에는 과외방이 유행했었다고 한다.
한 방에 12~13명씩 불법과외를 받고는 했다고....
는... 조만간 다시 다녀올게요....
2013년 쯤이었나. 가족이 강북삼성병원에 입원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며칠 왔다갔다하면서 지금의 박물관마을 자리를 몇 번 지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보았던, 음식점 간판들이 줄지어 서있던 골목. 그 골목이 기억난다.
바로 이 골목. 아직도 기억나는 풍미 추어탕. 들어가보지는 않았는데 왜 그 이름이 기억나는걸까?
돈의문 박물관마을 안에 있는 건물들은 예술공간 혹은 전시공간 등으로 쓰이고 있는데
한옥길의 한옥들은 작업공간이나 주거, 판매 공간으로 쓰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공간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깔끔하게 정비해놓고
앞서 보았던 아크릴 판넬과 같이 이 건물이 가진 역사를 설명함으로써 그 공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작년 7,8월 경에 돈의문 박물관마을이 사진찍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척 흥했던 적이 있다.
그 때 가봐야지 했다가 까먹구 이렇게 팀원들이랑 가게 되었는데
일하러 왔다는 것도 잊고 신나서 폴짝폴짝 뛰어다닐만큼 너무 좋았다.
유리와 콘크리트,철근으로 이루어진 신축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골목을 유지하고 감성과 기억과 역사를 유지하는 도시 재생을 하겠다고 했을 때,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은 분명 쉽지않은 생각이었을 것이고, 결정이었을 것이다.
역시, 새로운 시선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날이 추워지면서 거주하던 예술가들도 많이 빠지고 찾아오는 발길도 끊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300억 들인 돈의문 박물관마을이 유령마을이 됐다나...
조급해할 건 없다고, 그렇게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재방문 의사 100%이고, 어느 계절이든 예쁠 것 같은 공간이기에.
내가 이 공간에 머물렀다 간 것은 곧 내가 공간의 역사의 일부분이 되었다는 것이며
이 공간 또한 나의 기억의, 나의 역사의 일부분이 되었다는 것.
나는 그 사실이 참 기쁘다.
돈의문 박물관마을 공식 홈페이지 (투어 및 전시,공연 정보 & 신청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