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서울청년시민회의 평등다양성분과 이한
저는 남성이고, 페미니스트입니다.
한순간의 깨달음으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정체화한 건 아니에요. 눈앞의 문제를 인지하게 된 사건이 있었지만, 문제인식이 지금과 같은 페미니즘 ‘운동’으로 이어지는 데는 시간이 더 걸렸지요.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접한 건 2015년쯤으로 기억해요. 성폭력 예방교육 자리에서였죠. 그땐 제가 페미니즘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보단, 주변의 여성 지인에게 이런 게 있던데 네가 해보면 좋지 않겠냐며 가볍게 권하는 정도였어요. 그리고 다음해,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났죠.
처음엔 그 사건도 ‘내 주변의 일’로 와 닿지 않았어요. 단지 미디어에서 종종 접하는 끔찍한 사고 중 하나라고 생각했거든요. 다만 당시에 친구들이 절 강남역으로 데려갔는데, 그곳에 가고 나서야 큰 충격을 받았어요.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슬픔을 나누고 있더라고요. 나도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나 다수가 공감하는 문제를 왜 인지하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어요.
또한 페미니즘은 내 주변, 내 동료의 문제만이 아닌 ‘나의 문제’이기도 했어요. 가령 해외 봉사활동을 6개월 간 다녀왔는데, 동고동락했던 사람들과 헤어지는 날 눈물이 나지 않는 거예요. 분명 마음은 힘들고 슬픈데 그 표현을 도저히 못하겠는 상황...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 속에서 혼란을 겪는 와중에, 친구들이 제가 겪은 일을 페미니즘과 연결해줬어요. 추천받은 페미니즘 책을 함께 읽으면서, 이게 내 삶과도 밀접한 문제라는 걸 깨달았죠.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이하 남함페)은 그때의 책모임에서 출발했어요. 지금처럼 활동을 하게 될 줄은 전혀 예상 못했지만요.
남성도 페미니즘을 공부할 수 있을까?
올해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 20대 성인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를 보면,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는 남성의 비율은 10%인데, ‘미투’나 ‘혜화역 시위’ 같은 각각의 성평등 의제에 지지를 보이는 남성은 40~30% 정도로 훨씬 높게 나와요. 남성들이 페미니즘에 거부감을 느끼는 건, 그걸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었죠. 미디어나 SNS에서 만들어 놓은 편견에만 쉽게 노출되고 있으니까요.
그럴수록 더 공부해야 하는 건데, 아무래도 페미니즘 교육을 쉽게 접하긴 힘든 부분이 있지요. 저도 그랬어요. 페미니즘 교육을 들어 보고 싶어도, 막상 남자인 내가 가면 다른 여성들이 불편해 하지 않을까 고민이 앞서더라고요. 실제로 강연에 가보면 남성이 거의 없어서 주목 받기도 하고요. 자칫하면 오히려 마이크를 빼앗는 일이 될지도 모르니까... 이런 이유로 페미니즘을 알고 싶어도 망설이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개인적으론, 기관이나 기업에서 이수하는 법정의무교육을 통해 더 많은 남성들을 만나려고 노력 중이죠.
‘남함페’ 이름으로 열리는 강연엔, 단체 이름에 “남성”이 붙다보니 평소 주변 여성들과 갈등을 겪고 있는 남성분들이 많이 찾아오시더라고요. 대부분 ‘여자 친구 말이 이해가 안 되는데, 더 이야기 하면 싸울 것 같아서 여기 왔다’고 하세요. 사실 저에게도 비슷한 부분이 있어요. 제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애인인데, 그 친구가 이야기하는 것, 화내는 것에 공감하고 싶어서 공부를 하는 부분도 분명 있거든요. 저의 경험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제 개인적인 경험을 얘기하면서 책을 같이 추천해 드리죠.
‘남성 페미니스트’의 언어와 연대를 만들어 가야죠.
‘남성’ 페미니스트라서 겪는 어려움도 있어요. 첫째로 언어가 없다는 점. 가령 저는 ‘남성문화에 균열을 내는 게 남성 페미니스트의 역할’이라고 얘기하면서, 그 균열의 방법으로 소위 말하는 ‘미러링’ 방식을 차용했었거든요. 남성도 남성들의 여성혐오 발언을 고발하고, 적극적으로 비난하자는 거였죠.
그런데 어느 순간 이게 남성으로서 맞는 방식인가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도 한때는 저런 발언이나 생각을 했는데. 운 좋게 페미니즘을 알게 되었다는 이유로 면죄부를 얻으려 하는 건 기만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시에 그 방식은 충분히 효과적이지도 못했어요. 제가 하는 욕은 남성문화에 조금도 균열을 내지 못했죠. 오히려 제가 그냥 튕겨져 나오더라고요. 결국 욕하면서 카타르시스나 느끼는 건 아닌지 고민도 되고요. 지금은 비슷한 고민을 하는 남성을 모아서, 열심히 새로운 ‘언어’를 찾는 중이에요. 더 옳고 효과적인 언어를.
둘째는 고립이에요. 저희가 연대할 수 있는 자리나 사람이 별로 없다는 거죠. 남성연대가 여성운동에 얼마나 악영향을 끼쳐왔는지 잘 알고 있으니 이 상황을 이해하지만, 고민도 생겨요. 페미니즘을 접하고 나면 기존 관계는 이미 산산조각이 나있고, 새로운 관계는 어디서 만들어야할지 막막하거든요. 남성들 사이에서도 고립되고, 여성단체에 속하지도 않고.
그래서 다른 남성 페미니스트를 만날 때면 어떻게 살고 있냐고 꼭 한 번 물어보는데, 다들 비슷한 고민을 안고 활동하고 있더라고요. 처음 ‘남함페’를 시작했을 땐 내가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의욕이 앞섰는데, 지금은 그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며 안전지대를 구축해 가는데 더 큰 의미를 두는 것 같아요.
목적은 ‘착한 남자’ 되기가 아니에요.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면 공유가 연기한 남편 ‘대영’이 나오잖아요. 대영 같은 착한 남편 캐릭터만 해도 우리 사회엔 흔치 않아요. 그럼에도 영화 속에서 남편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같이 울어주는 것 밖에 없었죠. 애초에 이건 사회 구조의 문제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저는 저희가 ‘착한 남성’이 되는 걸로 그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사회 구조를 바꾸는데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개입해야죠. 결국 구조를 바꾸지 못하면 그 착한 남성도 방관자에 불과하니까요.
강연 마지막에 늘 하는 말이 있어요. “혼자서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 영화 <저스티스 리그>에 나오는 말인데, 저는 여기에 두 가지 의미를 담아 얘기하거든요. 하나는 혼자서 세상을 바꾸려다가 지치지 말자는 당부고, 다른 하나는 그래도 같이 하면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에요.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닐 거예요. 우선 할 수 있는 만큼 해보기로 해요. 지치면 같이 위로하고 쉬어요. 그러고 나서 또 함께 세상을 바꿔 봐요.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인터뷰 프로젝트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이하 서울청정넷)에서 2019 서울청년시민회의를 통해 활동하고 논의해온 내용을 나눕니다. 서울청정넷은 청년시민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시민참여기구로 청년문제를 비롯한 여러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책발굴 및 제안, 캠페인, 공론장개최 등 다양한 사회적해법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글. 강다은/ 편집. 한예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