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리 피디 Apr 15. 2023

게르만족의 대이동 중 대기중

실시간 유럽 수학여행기 21


독일 뮌헨 공항에 내리고 있다. 2시간의 비행 내내 정신없이 졸았다. 헤드뱅잉도 심해 옆자리 아줌마에게 미안하다. 꿀잠은 아니고 선잠이었다. 어설피 자고 나면 개운하지 않고 더 졸린 법이다. 아주 굶을 때보다 뭔가를 조금 먹은 후에 배가 더 고픈 것과 같은 이치다. 생각해 보면 매사가 그렇다. 우리의 욕망은 간사해서 넘사벽은 포기하지만 적당한 맛을 보면 승냥이 떼가 된다. 잔뜩 날카로워져 옆자리의 귀여운 게르만 아기의 칭얼거림마저 짜증 난다.

착륙할 때만 살짝 시끄러웠지 비행 내내 실실 웃으며 즐기는 순한 게르만 아기

그 사이에 루프트한자가 내려줘서 지금은 공항 환승 대기실이다. 나흘 전 수화물 분실로 상했던 기분은 어쩌겠는가. 같은 항공사 왕복 티켓이니 숙명이지. 크게 다툰 친구하고 또 같은 반이 되기도 한다. 민망하지만 그냥 지내야 하는 게 인생이다. C'est la vie. 그런데 악연이 더 남은 걸까? 아까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이륙 전 항공사 직원과의 대화.

"비행 얼마나 걸리지?"

"1시간 50분"

"비행 중에 먹을 것 뭐 안 주지?"

"우리 줘"

오, 정말? 갈 때는 안 줬는데 땡큐다. 그런데 정신없이 졸고 나서 들으니 착륙 방송이었다. 밥 안내가 아니라. 나는 배신당한 파블로프의 개의 심정이 되었다. 엥, 주긴 뭘 준다는 건가? 또 한 번 약이 올랐다. 대화를 복기해 보니 이렇다.

"You don't serve anything to eat during the flight, do you?"라고 내가 물었었다.

"Yes, we do."라고 티켓 확인하던 여승무원이 분명히 말했다. 다소 비몽사몽이었지만 정확히 들었다. 영어에서 이 대답은 준다는 말 아닌가! 가만 보니 부정 의문문에 대한 그녀의 대답에 오류가 있었다. 안 주지?라고 물을 때 "어"라고, 우리나라 식으로 대답한 것이다. 루프트한자는 나에게 로또 1등인 모양이다. 하나도, 단 하나도 안 맞아. 같은 한자 문화권인데?


불어에서는 부정의문문에 긍정의 답을 할 때 oui도 non도 아니고 si를 쓴다. 예스 노가 아니라 다른 말이 있는 거다. 웬걸 쯤으로 번역하면 된다. 그 자식 비행기 못 탔지? 웬걸, 잘 탔어, 이런 식이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독일어도 영어와 다를 가능성이 크다(아시는 분 계시면 답글 달아주세요. 한 분을 추첨해서 뮌헨 공항 낮잠캡슐에 넣어드립니다. 단 오늘까지 유효).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신 있게 예스라고 해놓고 쫄쫄 굶게 한단 말인가?


이 공항은 도착, 출발구역이 따로 없는 것 같다. 내린 게이트가 바로 환승할 곳이다. 6시간을 여기서 지내야 한다. 또 톰 행크스가 된 기분인데 이번엔 '터미널'이다. 그나저나 내 짐가방 윌슨이 이번에는 잘 따라 내렸겠지? 공항 이곳저곳을 둘러보는데 루프트한자 라운지 안에 내핑캡(napingcaps)이라는 것이 있네. 꼭 코인 노래방처럼 생겼는데 안쪽을 들여다보니 오호~ 숙박시설이다! 역시 실용적인 게르만들이다. 저 안에 들어가 자야겠다 싶어 키오스크를 들여다보니 4시간에 10만 원이다. 세상에나, 가장 비싼 대실이구나! 넘사벽 신문물은 뒤로 하고 꿩 대신 닭으로 소파형 쉼터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감사합니다, 원망스러우면서도 사랑스러운 루프트한자!

장거리 비행에 지친 여행객을 위한 서비스인가 지친 여행호구를 잡는 상술인가

뮌헨 시내 구경을 해볼까도 했지만 금세 생각을 철수했다. 구 씨의 안내로는 30킬로, 한 시간을 가야 하고 왕복 두 시간에 출입국, 보안 검사 등등 엄두가 안 난다. 무엇보다 내 체력이 고갈됐다. 그냥 있어야겠다. 터미널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로 잘 알려져 있다. 플라톤은 아니지만 '국가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하는 내용이다. 톰 행크스가 나라 잃고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를 보면 나라는 필요악 아닐까 싶다. 내가 아무리 코딱지 만한 애국심의 소유자라 해도 오늘 한국에서 쿠데타가 나서 타국으로부터 외교권을 인정받지 못한면 나는 꼼짝없이 뮌헨 공항에서 살아야 한다. 물론 전쟁이나 정치 탄압 같은 국가폭력도 있고 억울하게 죽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국가제 자체가 없다면 세상은 더 정글 같지 않을까? 프랑스혁명이 미국에, 미국이 전 세계에 영향을 줘 우리는 민주주의 치하에 살고 있다. 민주주의는 국가를 괴물이 될 우려가 있는 수호자로 규정한다. 국가는 통치의 주체이면서 감시의 대상이어야 한다. 그래서 권한 분산과 균형이 정답인 것이다. 국가 없이도 평화가 있다고 믿는다면 존 레논의 노래처럼 몽상가일 거다.

근위병 군악대가 존 레논의 imagine 같은 무정부주의적 노래를 연주하다니..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you)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 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엊그제 버킹엄궁에 갔을 때 근위병들이 연주한 곡이다. 국가와 왕실의 상징인 근위병 브라스밴드가 이런 곡을 하다니 아이러니다. 어쨌는 나는 한국인이다(뜬금없이?) 자부심과 수치심, 우국심과 부러움을 다 느낀 여행이었다. 여기가 중간기착지가 아니라 내 터미널, 내 거주지가 되는 일만은 없길 바란다.

낮잠 캡술 밖이지만 그래도 좋아

조금 전에 루프트한자 서비스센터가 있길래 갔다. 짐가방 분실 상황을 설명하고 보상받는 방법을 문의했다. 40 전후로 보이는 게르만 아저씨는 친절하게 온라인 접속, 입력할 필요 정보, 영수증 첨부 방법 등을 세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 항공사에 대한 원한이 조금은 풀리는 듯하다. 룸메 중 누군가가 그랬다. 코로나 때문에 장기휴직을 해서 다시 잡은 일손이 숙달되지 않아 그런 실수가 많다고... 뜯어보면 다 이유는 있는 것이다. 시간도 지났고 친절한 아저씨도 만났으니 잊어야겠다. 인천 가는 비행에서 사고만 치지 말아다오, 게르만님들아. 아, 다시 잠이 온다. 인간의 욕구 중에 가장 세다는 녀석이다. 기회와 체력과 글감이 되면 다시 쓰겠다.



이전 20화 올롸잇? 올나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