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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리 피디 Apr 15. 2023

평면에서 입체로, 경험에서 성장으로

실시간 유럽 수학여행기 22


사실 21화는 실시간이 아니었다. 뮌헨 공항이 아니라 인천 공항에서 발행했다. 이상하게도 독일에서부터 계속 저장 오류가 떴다. 11시간 비행을 마치고 내려 어찌어찌 다시 작업해 올린 것이니 반나절 지연 여행기가 옳겠다(소제목과 다르다고 따질 독자분은 없겠죠). 지금은 집으로 가는 공항버스 안이다. 그러니까 이 글이 마지막 여행기가 될 것이다.

영국 국립미술관에 있는 고흐의 작품 해바라기

그림이든 여행이든 질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루브르와 오르세, 영국 미술관에서 많은 작품들을 보았다. 미술책과 인터넷에서 보던 것들이다. 현장에서 실물을 본다는 건 무엇이 다른가,라고 묻는다면 질감이라고 답하고 싶다. 빈센트와 에두아르, 파블로와 레오나르도가 터치하던 붓의 놀림이 눈앞에서 펼쳐진다. 아무리 고해상도로 찍은 해바라기 사진이어도 인터넷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실제 작품만이 줄 수 있는 생생함이다. 나는 좋아하는 그림들을 허용된 가장 가까운 위치까지 눈알을 갖다 대고 오래 바라보았다. 해바라기 꽃잎에 닿은 빈센트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내 시세포와 시신경, 후두엽에서 전두엽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감상 과정은 내게 말을 거는 듯한 감동으로 이어졌다. 작품명과 화가를 짝지은 것 중 옳지 않은 것은? 따위의 시험문제에서는 결코 확인할 수 없는 살아있음이다(그런 방식이 옳지 않음!). 평가를 위해 알게 된 지식들은 사실 죽은 것들이다.

루브르에서 만난 밀로의 비너스상이다. 그리스 밀로섬에서 발견되었다

역사와 문학, 철학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내가 알던 지식들이 평면이었다면 이번 수학여행에서 확인한 것은 입체였다. 프랑스가 사랑하는 사상가 볼테르의 시신 앞에서 추모하는 마음으로 그의 삶과 말을 되새겼다. 양심과 행동의 지성인 에밀 졸라의 기고문 나는 고발한다 실린 신문을 보았다. 빅토르 위고의 무덤(집은 못 들어갔지만)은 그의 작품 레미제라블 노트르담드파리를 더욱 살아 있는 것으로 느끼게 해 주었다. 현장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질감과 입체감, 그것이 여행의 진짜 이유일 것이다.

영국박물관에 전시된 로마시대의 동전이다. 반역의 함정을 파는 질문에 예수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고 말한 그 동전이다.

성경이이든 그리스 로마 신화든, 역사책이나 소설책에서 읽었든 평면적인 텍스트로만 알던 것이 실질적이고 입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하면서도 이 점을 놓치는 것 같다. 순간의 감동과 즐거움을 극대화하려면 떠나기 전에 미리 공부해야 한다. 입을 옷에만 신경 쓸 것이 아니다. 적어도 그 나라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 언어를 조금이라도 익히고 가는 것이 좋다. 현장에서도 자랑할만한 사진보다 그 순간의 내 감정에 더 집중해야 한다. 다행히 프랑스든 영국이든 박물관이든 미술관이든 앉을자리가 충분했다(작품들이 보이는 곳에 앉을 수 있다). 지치면 쉬고, 쉬면서 찾아보고 다시 힘을 내 감상을 이어가는 것이다. 사진은 감상과 생각 정리가 끝나면 떠나기 직전에 찍는 걸 권하고 싶다.


아까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에 옆자리 독일 청년이 세관신고서 쓰게 펜을 빌려달라고 하더라. 말이 트여서 30분 정도 재미나게 대화를 했다. 4주 동안 한국어를 배우러 오는데 아직 안녕하세요 밖에 모른단다. 나도 구텐타크와 아웁비더젠 정도라고, 겸양으로 응수했다(나중엔 3성과 조동사 본동사 분리 등 독어 문법의 어려움까지 얘기하긴 했지만). 어떻게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됐냐고 물었더니 그애 눈동자가 반짝였다. 역시나 케이팝이란다.

"제일 좋아하는 뮤지션은?"

"블랙핑크. 작년에 독일 공연도 갔었지."

"오, 그래? 한 달 있으면서 서울에서도 만나면 좋겠네"

"그러면 좋겠지만 안 될 거야."

"멤버 중 최애는?"

"로제"

스물 갓 남긴 노랑머리의 게르만 청년의 얼굴이 장밋빛이 된다. 흠모하는 자의 표정이다. 귀엽다.

"서울에만 있을 거야?"

"혼자 왔지만 급우들과 뜻이 맞으면 주말에 부산에 갔다 오려고."

"오, 부산 좋지. 꼭 바닷가에서 회 먹어."

 한국 여행도 입체적일 것이다. 블랙핑크 로제라는 선망의 대상이 그 친구의 한 달을 풍요롭게 할 테지. 로제가 걷는 길은 이렇구나, 로제도 여기 와 봤을까, 로제는 로제 떡볶이를 좋아할까 하면서 말이다. 루브르든 에펠이든 블랙핑크든 탐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여행이 풍성해진다. 부디 멋진 한 달 보내길~!

프랑스 현대미술관에서 본 마크 부뤼스의 작품 the oldest story

이 작품을 소개하면서 긴 여행기를 마무리하고 싶다. 파리에서 내 마지막 일정은 퐁피두 센터에 있는 국립 갤러리였다. 루브르가 고대와 중세, 오르세가 근대 인상파 위주라면 국립 갤러리는 입체파 이후 현대미술 위주로 전시돼 있다. 좋아만 할 뿐 미술 지식이 부족한 나는 특히 현대로 올수록 잘 모른다. 이게 벼락치기도 안 된다. 80년대 이후 현대자동차의 라인업을 지금 시점에서 외운다고 외워지겠는가. 새 차가 출시될 때마다 눈여겨보고 품평한 40년의 경험은 못 따라가는 법이다. 아무튼 현대미술은 내게  그런 부담이 있는 존재다. 그런데 유독 몇 작품 앞에서 발걸음이 멈추게 되었다(여기도 모든 작품 앞에서 멈춘다면 개관부터 폐관될 때까지 있어야 한다. 수박은 겉만 핥고 좋아하는 것에 집중해야). 설명을 보니 마크 부뤼스라는 작가다.

익숙함과 동질감으로 내 시선을 끌었던 마크 부뤼스의 작품


알고 보니 한지를 직접 만들어 그 위에 그린단다. 80~90년대 한국과 일본을 자주 다녀갔는데 한지의 매력에 심취했단다. 어쩐지 서양 작가치고 뭔가 우리 냄새를 풍긴다 했어.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부뤼스가 한지에 매료된 것처럼 서로 다른 것에 대한 관심이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에너지가 되는 것 아닐까? 인생을 예술에 비유한다면 내 인생도 뭔가 다른 것이 들어와 더 아름다워지는 것 아닐까? 내 생활과 내 생각에만 함몰되지 않고 끊임없이 다름을 탐구해야 더 풍요로워지는 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만나고 책을  읽고 여행을 가고 영화를 보는 것이겠지.

 

이 여행기와 '시인칭여행자시점' 매거진 시도 쓰면서 열흘을 보냈다. 정말이지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될 것 같다. 읽어주신 분들, 시덥잖은 남의 여행에 같이 따라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보내주신 직장, 가정의 관계자 여러분께도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대리만족이든 뭐든 즐거우셨길 바랍니다. 개똥 같은 여행기에서도 금쪽 같은 깨달음을 얻으셨다면 더 다행이고요. Au revo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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