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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리 피디 Jul 23. 2024

유감스럽다

서운함만 쌓이는 유감 표현


한국어를 수십 년째 배워 쓰고 있지만 도무지 알 수 없는 표현이 있어요. 바로 유감이다, 유감스럽다인데 이 글을 쓰기 위해 찾아본 뒤에도 이해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이 알려준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유감 遺憾 :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

· 유감을 품다.

· 유감의 뜻을 표하다.

· 내게 유감이 있으면 말해 보아라.

· 우리는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 데 대해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 싸움터에 나가게만 해 주신다면 소인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유감스러운 낱말, 유감


남길 유, 섭섭할 감 자를 쓰는군요. 섭섭함이 남는다는 뜻입니다. 섭섭함이라는 감정은 약한 원망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섭섭한 감정을 느낀 누군가가 있다면 '피해자'라고 봐야 옳겠네요.


일상생활에서는 유감이라는 표현을 잘 안 쓰는 듯합니다. 예전에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아, 그러고 보니 옛날에 중학교 시절 사내아이들 틈에서 사용됐던 것이 기억납니다. 시비를 걸 때 "너 유감 있냐?"라고 묻기도 했습니다. 아니꼽냐라는 뜻).


유감스럽다, 유감을 표한다는 이제 전적으로 정치와 외교의 언어입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외교부 대변인 등이 많이 씁니다. 이들이 사용할 때 유감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언어가 되곤 합니다. 정확히는 가해자가 반성하고 싶지 않거나 피해자 코스프레, 반격을 목적으로 쓰입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사과를 하면서도 유감이라니.. 자신의 말에 섭섭함이 남는다는 겁니다. 사과는 가해자가 하고 유감은 피해자가 표하는 것인데 이 무슨 자웅동체란 말인가요. 행간을 읽어보면 내가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긴 한데 내 본뜻을 잘못 이해한 너희들이 섭섭하다 정도 되겠습니다. 뜨거운 아이스라테 같은 말이죠.


말이야, 방구야?


정치인들이 사용하는 유감이란 낱말은 이처럼 비겁합니다. 뒤끝이 있어요. 속 시원하게 사과하는 일이 없고 사과를 하면서도 조건부이거나 사족을 달아요. 정치적 수사라는 말이 있는데 본심과 표현이 다른, 전략적인 어휘 구사란 뜻입니다. 정치와 외교의 특성이 그런가 보다 싶기도 하지만 그 위선에 기분이 나빠지는 일도 많습니다.


방귀는 거짓이 없습니다. 나오는 순간 다 압니다. 저 사람이 속이 안 좋구나, 뻔뻔하구나, 괄약근이 약하구나,로 반응합니다. 그런데 말은 다릅니다. 나오는 순간, 해석이 다양해요. 쓰는 단어, 말투, 몸짓에 따라 다르고 듣는 사람의 감정, 입장, 상황, 이해력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늘 정확히 이해될 순 없어도 늘 모호한 것은 나쁩니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 말이 최악의 말이죠. 정치인들의 유감 표명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국민의 뜻 어쩌고 하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민이 한두 사람도 아니고.. 출마한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아무말 대잔치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그야말로 말하기 위해 말을 합니다. 말하기를 너무나 좋아해서 누가 말리지 않는다면 밤새도록 할 태세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듣다 보면 무슨 말인지 종잡을 수가 없어요. 자기 말끼리 충돌하는 일도 잦습니다. 빈 컨테이너가 수시로 왔다갔다 하는데 그 안에 화물이 없는 셈입니다. 냉무예요.


Bullshit geneator (헛소리 생성기)라는 것이 있는데 키워드를 넣으면 정말 아무 말이나 내뱉어 주는 알고리즘입니다. 저는 그래서 그 사람을 Bullshit geneator, 줄여서 BG라고 불러요. 사실관계도 따지지 않고 말의 파급도 고려하지 않는, 그야말로 방귀만도 못한 언어생활입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은 체계화된 언어로 소통한다는 점입니다. 언어의 본질은 이해입니다. 혼란이나 면피, 과시가 아닙니다. 그래서 듣는 이의 입장과 수준, 감정에 적합한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고위직 정치인이나 기업 경영자들 중에 헛소리꾼이 많은 이유는 이들이 권력에 취해 혹은 권력을 잡겠다고 언어의 본질을 잊기 때문입니다.


정치 혐오의 이유


솔직하지 못하면서도 굽히기는 싫은 정치인들의 노력들이 쌓이고 쌓여서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트럼프 같은 솔직?한 정치인이 혐오를 부르는 일도 드물게는 있죠. 그의 경우는 말보다 방귀에 가까워요). 책임은 회피하고 권한만 키우고 싶은 욕망 때문입니다. 동전의 양면인데 그걸 나눌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정치와 경영은 기본적으로 선택 행위지, 발화 행위가 아닙니다. 올바른 생각으로 바른 의사결정을 내리는 리더들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말은 적게 하고요, 하더라도 밀도 있게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정말 유감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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