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후폭풍 휘몰아치는 조선의 겨울
유난히 추운 날들이었다.
왕의 개엄(改掩) 선언 이후 조선 팔도의 민심은 들끓었고 날씨는 더 포악해졌다.
나흗날 새벽, 결심실에서 렬(列)은 김용헌, 이상만, 여인영 등 충함파들에게 말했다.
"쯧쯧, 그까짓 끌어내라는 작전 하나 제대로 수행도 못하고.. 내 이제 누굴 믿고 정사를 편단 말인가?"
"전하, 죽여주시옵소서"
대(對)오랑캐사령관인 여인영이 죽음을 청하였다.
"전하, 이미 엎어진 물은 담을 수 없는 법이옵니다. 개엄이 해제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적들의 역공을 잘 막아야 합니다. 그냥 겁만 주려고 그랬다고 입을 맞춰야 할 것이옵니다."
그나마 냉정을 유지하던 이상만이 대응책을 내놓았다.
렬은 신하들이 한심했다.
지난 며칠간, 그는 서너 차례 충함파들을 안가로 불렀다.
사흩날의 계획에 대한 언질을 주었으나 이들은 우왕좌왕하며 일을 그르쳤다.
육십오 년 전 박종(朴宗)이나 사십오 년 전 전종(全宗)은 쉽게 해냈는데 왜 오늘의 거사는 무위에 그쳤단 말인가.
시대가 변해서인가, 참모들이 멍청해서인가?
사실 참모들은 설마설마했다.
안가 회동에서 개엄 어쩌고 했어도 렬이 늘 그러하듯 술 취해 주정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왕은 엎드린 신하들과 널부러진 술상을 뒤로하고 퇴청하였다.
인시(寅時)가 다가오는데도 한겨울이라 아직 밖은 어두웠다.
침소에 중전 건(乾)이 잠들어 있었다.
자다 깬 견공(犬公) 두 마리가 윗목에서 엎드린 채로 임금을 흘깃거렸으나 이내 다시 머리를 앞발 사이에 파묻었다.
사가(私家)인 악희로비수타(岳喜露飛水打)에서부터 키우던 녀석들이다.
중전이 깰까 렬은 조심스럽게 이불을 들추고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건이 뒤척이며 예의 코맹맹이 소리로 중얼거렸다.
"옵하, 어떻게, 하겠다는 거는 잘 됐어요?"
건은 렬이 왕위에 오르자 옵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전하(殿下), 폐하(陛下), 각하(閣下), 예하(隷下) 등 다양한 존칭이 있었으나 중전은 옵하라는 기이한 호칭으로 왕을 불렀다.
"어, 어, 뭐, 그럭저럭. 중전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하여튼 잘 해요. 잘하라고. 나 망신시키지 말고.."
건은 눈도 뜨지 않고 중얼거렸다.
렬이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십 초도 지나지 않아 중전이 고른 코골이 소리를 냈다.
'내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여인만큼은 반드시 지키리라.'
왕은 피곤한 눈을 감았으나 쉬이 잠들지 못했다.
다음날 조선 팔도는 그야말로 난리법석이었다.
조선왕조 칠백 년에 이렇게 허무하게 끝난 군사작전은 처음이었다.
인조 시절 이괄의 난이 필적할만한데 그 또한 며칠은 경복궁을 장악했다.
윤종이 시도한 친위 구대타(究大打-크게 한방 때리는 걸 궁리함)는 민의에서 두 시간 만에 해제되었다.
몇 달 전부터 저잣거리에서 유행하던 광대놀이는 단연 '한양의 봄'이었다.
그중에서도 전종(全宗)을 분(扮)한 광대의 대사는 코흘리개 아이들까지 따라할 정도였다.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반역 아닙니까?"
전종은 성공하여 우유부단한 최조(崔祖)를 끌어내리고 옥쇄를 쥐었건만 윤종 자신은 왕이었음에도 반역으로 몰릴 위기에 처한 셈이다.
나흗날 아침, 사대문 안의 모든 백성들은 간밤의 일로 잠을 설쳐 눈이 벌갰다.
새벽에 혹자는 민의당으로 달려갔고 혹자는 홍인(紅人) 당사에 항의하러 갔다.
전술한 바와 같이 홍인 당수는 훈(訓)이었으나 지지 기반이 미약했다.
홍인의 가장 큰 계파는 친렬이었고 원내당수 추(墜)가 그 선봉이었다.
추는 어젯밤 홍인들을 민의당으로 부르려다 말고 당사로 오라고 지시를 바꾸었는데 해제를 무산시키려는 작전이었다는 소문이 사대문 안에 퍼졌다.
이튿날 오후 명(明)이 이끄는 청당과 국(國)이 이끄는 혁신당, 이준썩이라는 분홍당(分紅堂) 등이 합심하여 임금의 탄핵(憚劾)안을 발의하였다.
홍인들은 갈팡질팡하였다.
처음에 훈은 개엄은 잘못됐지만 탄핵은 안된다고 하다가 자진하야를 권하다가 조건부였다가 무조건이었다가 마침내 탄핵 찬성으로 돌아섰다.
그는 두 번이나 칩거 중인 렬을 만나러 용산으로 갔다.
다녀와서 입장이 계속 바뀌었는데 멸시를 당했는지, 호통을 쳤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훈을 따르던 친훈 세력은 고작 열 명 남짓이었는데 추를 위시한 강경세력이 목소리를 높이자 가뜩이나 약했던 위세가 점점 약화되었다.
동짓달 이렛날, 탄핵안에 대한 표결이 민의당에서 청인들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민의당 밖 여의도는 경광봉을 든 백성들로 인산인해였다.
"병사의 창칼로 백성을 협박한 렬은 자진하야 하시오"
"내란에 동조한 홍당은 해산하시오"
"민당은 하루속히 임금의 직무를 정지하시오"
주로 사오십대 남자들과 이십대 아녀자들이었다.
이날 홍인들은 중전의 특검안을 반대하기 위해 나왔다가 임금의 탄핵안은 거들떠보지 않고 나와버렸다.
두 안건의 의결정족수가 달라 벌어진 일이었다.
청인들과 여의도를 가득 메웠던 백성들은 허탈감과 분노에 휩싸였다.
"홍인은 표를 던지시오"
"백성의 대표로서 책임을 다하시오"
"역사에 죄를 짓지 말고 양심을 따르시오"
청당은 이드레 후 또 한 번 표결을 시도했다.
백성들의 호된 질책에 놀란 홍인 몇 명이 찬성으로 돌아서면서 마침내 탄핵안은 가결되었다.
이백삼 표, 가까스로 통과되었다.
여의도를 메웠던 백성들은 춤추며 노래 불렀고 옛 궁궐 인 경복궁 앞에 모였던 백성들은 침통함에 빠졌다.
한편, 계엄 후 나라의 온갖 관청들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사헌부는 자기들이 배출(혹은 배설)한 임금이긴 하였지만 봐준다는 오해를 사지 않으려고 수사를 시작했다.
병조판서 김용헌을 잡아들이는 것이 시작이었다.
사헌부와 수사권 갈등을 빚던 의금부도 이때다 싶어 내란 수사를 시작하였다.
도성수비대장, 내금위대장, 어영청장, 도성좌우수사, 별무반장, 대오랑캐사령관 등 개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자들을 불러다 수사하였다.
고위벼슬아치수사처라는 곳도 가세하였다.
이는 문조(文祖)가 사헌부의 힘을 뺄 요량으로 탄생시킨 수사기관인데 임금과 친인척, 정 삼 품 이상 고위직의 비위 수사를 맡았다.
고위벼슬아치수사처는 이름만 그럴싸할 뿐 수년째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욕을 먹고 있었는데 이때다 싶어 내란 수사에 착수하였다.
백성들은 관련자들의 연행과 국문, 조사와 구속 소식에 몹시 혼란스러웠다.
어느 기관이 권한이 있는지, 있다고 우기면 가능한 것인지, 서로 경쟁하면 어디가 이길지, 이겨서 좋은 건 뭔지 도통 가늠하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의 칼끝은 모두 한 사람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이다(그 겨냥이 시늉인지, 봐줄 요량인지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였다).
윤종은 칩거하다가 열흘 만에 마침내 궐에 나타났는데 자신은 잘못이 없고 이 모든 것이 자유조선을 위협하는 반조정세력 때문이라고 호소하였다.
이 때문에 청인 내에서는 제 이차 개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토록 큰 혼란을 자초하였는데 어찌 임금이 또 한 번 일을 벌이겠소?"
"지난 개엄은 누가 예상키나 하였습니까? 모르는 일이외다"
"또 일이 생겨 잡혀가면 우리 모두는 죽은 목숨입니다. 필히 막아내야 합니다"
청당 입장에서는 공석인 경국대전심판소 판관 세명을 임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아홉 명의 판관들이 윤종의 탄핵 여부를 최종 결정하기 때문이다.
민당의 탄핵안 가결 이후 한득수가 임금 대행이었는데 그가 경국대전심판소 판관 임명을 거부하자 청인들은 한득수마저 탄핵시켜 버렸다.
정사는 대행의 대행인 최장목의 책임이 되었다.
정치는 이미 오래전 실종되었고 법적 분쟁 역시 누구에게 권한이 있는지를 놓고 갑론을박, 설왕설래, 좌충우돌이 벌어졌다.
한편, 같은 말을 계속하면 지겨워서 귀를 막는 자와 미혹되어 믿는 자가 생기게 마련이다.
재야에는 홍인보다 붉은 진홍파(眞紅派)가 있었는데 이들은 윤종의 개엄을 계몽령이라 부르며 정당하다고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렬은 영웅이며 속히 복귀해야 한다, 청인은 모조리 척결돼야 할 오랑캐다, 명은 심각한 범죄자로서 퇴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진홍파의 추동에 힘입은 홍당은 당황에서 벗어나 슬슬 반격의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였다.
(5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