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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짓달 사흩날 밤 무슨 일이 있었나

3편 왕의 역린을 건드린 자들

by 이지완


"작금의 자유 조선은 반왕실세력의 역모 위기에 처해 있다. 이들의 위협으로부터 종묘사직을 수호하고, 백성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갑진년 동짓달 사흘 자시부로 조선 팔도 전역에 개엄(改掩)을 선포하는 바이다."


윤종(尹宗)의 결연한 목소리가 춘추관에 울려 퍼졌다.


당하(堂下)에 있던 삼정승과 육조판서, 도승지와 부승지들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두려움이 서렸다.


일부 참석자들은 개엄이 뭔지 몰라 옥편을 뒤지기도 했는데 '고쳐서(改) 숨긴다(掩)'는 뜻을 확인하였다.


이들은 불과 이십 분 전에 비상 어전회의가 열린다는 전갈을 받고 긴급히 모인 터였다.


예조판서는 술을 마시고 있었고 형조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좌의정 최장목(長木, 후에 그는 득수의 뒤를 이어 임금 대행을 맡게 된다)은 그의 주특기대로 돈을 세고 있었는데 추수 때가 되어 소작농들이 바친 소작료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주상의 긴급 호출에 부랴부랴 모인 이들은 주상의 계획을 듣고 매우 놀랐다.


"전하 이는 개국 이후 전례가 없던 일이옵니다"

"훗날 역사가 오늘을 갑진사화의 날로 기록할까 심히 두렵사옵니다"

"아무리 청인(靑人)들의 행패가 무도하다 해도 이같은 대처는 옳지 않은 줄 아뢰오"

"전하, 이는 사십오 년 전 전종(全宗)께오서 하신 일인데 그때와 지금은 많이 다르옵니다"

"백성들의 반대가 극심할 터인데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이러십니까?"


라고 말했다는 설과 아무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이같은 이견이 나왔거나 침묵이 이어졌거나 한데 적극적인 지지가 없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이렇게 되자 렬(列)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백성들이 무도한 청인들의 행태를 낱낱이 알아야 할 것 아니냐? 게다가 작년 민의 선거에서 반조정세력이 작당하여 부정을 저질렀음을 경들은 모르시오? 훗날 역사 기록이 무섭다면 내 바로 없애주지. 여봐라, 저 사관(史官)둘을 밖으로 끌어내라. 지금까지 기록한 것들은 모조리 불태워라!"


임금의 불호령이 근정전을 쩌렁쩌렁 울렸다.


잠시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고 이를 깬 이는 병조판서 김용헌이었다.


"대감들은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시오? 주상께오서 치밀하게 준비하여 시행코자 하시는데 신하 된 자로서 충을 다하진 못할망정 어찌 발목을 잡는단 말이오? 이런 태도야말로 역적의 언행 아니겠습니까?"


용헌이 편을 들어서 그런지 상기되었던 렬의 얼굴과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경들의 고견은 잘 들었소. 병판의 충심도, 나머지들의 이견도 충언으로 받아들이겠다. 허나 내 계획대로 할 것이니 이제부터 간하는 자는 충심이 아니라 역모로 벌할 것이다. 알겠느냐?"


"전하, 분부대로 하겠나..."


신하들이 숙인 고개를 들기도 전에 렬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임금이 근정전을 뒤로하고 춘추관으로 향할 때 눈치 빠른 병판만이 가장 먼저 그를 수행하였다.


용헌은 세 달 전 병조판서로 임명된 자인데 본디 왕의 호위를 책임지는 숙위군장이었다.


그는 소싯적에 충함서당에서 수학하였다.


이곳은 왕을 배출(배설이라 표현하는 자도 있다)한 곳이기도 하였는데 렬은 용헌의 구 년 선배였다.


대오랑캐사령관 여인영과 이조판서 이상만 역시 충함서당 출신이어서 함께 충함파라고 불렸다.


동문(同門)이라는 이유로 이들은 가까이 지냈고 특히 북촌의 안가에서 위숙희를 자주 마셨다.


숱한 시샘과 구설수에도 용헌는 병조판서에 올랐다.


개엄은 병판의 건의가 있어야 가능한 것으로 경국대전에 명시되어 있다.


측근 용헌의 병판 임명은 이날 개엄 선포를 위한 왕의 치밀한 계획이었던 것이다.


춘추관으로 이동한 왕은 계엄 선언 후 포고령 일호를 낭독하였다(고어로 번역을 해야 되는데 귀찮아서 전문을 그대로 싣는다. 양해 부탁-피리피디).


1.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

2.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거나, 전복을 기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가짜뉴스, 여론조작, 허위선동을 금한다.

3.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4 .사회혼란을 조장하는 파업, 태업, 집회행위를 금한다.

5. 전공의를 비롯하여 파업 중이거나 의료현장을 이탈한 모든 의료인은 48시간 내 본업에 복귀하여 충실히 근무하고 위반 시는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

6. 반국가세력 등 체제전복세력을 제외한 선량한 일반 국민들은 일상생활에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

이같은 개엄 선언에는 깊은 내막이 있었다.

렬(列)이 취임 이후 점점 궁지에 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 궁지는 스스로가 팠을 수도 있다.




동래 서쪽 충무(忠務) 땅에 기거하는 명대균이란 자는 정치 거간꾼이다.


그는 조정에 나아가고자 하는 선비들을 돕거나 민의(民議) 선거에 출마하려는 자들에게 돈을 받고 조언하였다.


원래 전신(電信) 명부를 수단으로 영업을 하였는데 방대한 연락처를 이용하여 민심조사업에 뛰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그의 명성은 정치인들 사이에서 커져 갔다.


민심 예측에 용할 뿐만 아니라 표를 많이 얻는 방법, 좋은 자리에 영전하는 방법 등을 알려주고 권세가, 특히 홍인의 실력자와 연결시켜 준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의 조력을 받으려는 홍인들이 암암리에 충무로 내려갔다.


한성부 판윤 오대감과 달구 관찰사 홍대감도 명대균의 신세를 졌다.


임인년 당시 대권을 앞둔 렬과 부인 건 역시 그를 만났다.


그들이 패권을 쥐게 된 것은 명대균이 도와서인지는 명확치 않으나 그 셋은 그렇게 믿었다.


한양과 충무는 멀었으나 이들은 자주 연락하며 조정의 인사와 민의 공천을 의논했다.


이들의 관계가 세상에 밝혀진 것은 그해 구월, 뉴스 도마도의 보도 때문이었다.


이후 후속 보도와 검찰 조사 등이 이어지면서 조선 팔도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사헌부의 수사를 받게 된 명대균은 스스로 구명을 위해 용산에 신호를 보냈다.


안위를 보장하면 함구하겠다는 거였는데 렬과 건의 입장에선 이미 손쓰기 힘든 지경이었고 애매한 변명으로 일관하였다.


시월과 십일월은 온통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장안의 화제였다.


시한폭탄 같은 명대균의 입 때문에 조정의 분위기는 살얼음판이었다.


왕과 중전 모두 잔뜩 긴장했고 도승지는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불안감을 숨길 수는 없었다.


청인들이 고기 만난 이리떼처럼 물어뜯은 것은 당연했다.


홍인 핵심부에서조차 임금의 하야(下野)또는 치세기간 단축을 골자로 한 경국대전 경정(更訂) 방안이 나왔다.




당시 홍인의 수장은 훈(訓)이었다. 그는 본디 사헌부에서 렬과 같은 길을 걸었던 자였는데 자연스럽게 형조판서에 올랐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둘의 사이가 벌어졌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홍은 친렬파와 친훈파로 나뉘게 되었다.


형판에서 물러난 훈은 홍당을 장악했다.


젊은 나이와 참신한 이미지, 수재다운 언변으로 홍당 당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개엄 선언이 있기 전, 십일월에 렬과 훈은 조정 운영에 대해 의논하려고 두어 차례 만났다.


그 또한 훈이 여러번 청한 것인데 렬은 한참을 간 보다가 마지못해 응했다.


명대균 수간달(壽看澾-목숨을 볼 정도의 사건)에 대한 대응 논의도 있었음은 물론이다.


대화 내용은 정확히 전해지지 않았으나 이미 둘의 관계는 이미 어긋날 대로 어긋나 있었다는 게 호사가들의 분석이다.


당연히 성과는 없었다.


렬이 이름대로 팔과 다리를 쩍벌(列)려서 부하 대하듯 한 장면이 어떤 사간원 관리에게 목격돼 사대문 안팎의 백성에게까지 알려졌다.


민심은 둘로 갈렸다.


어린놈이 임금을 가르치려 든다(친렬)와 임금이 옹졸하고 권위적이다(친훈)로 나뉘었다.


동짓달 사흩날 밤 전갈을 받은 훈은 부랴부랴 민의당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의금부 포졸들과 어영청 군병들이 진입해 있었다.


사대문 안의 백성들 일부가 민의당 정문에서 포졸들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개엄철회, 주상하야 등과 같은 구호를 외쳤다.


훈이 가까스로 민의당에 들어가자 온통 청인 벼슬아치들 천지였다.


그중에는 청인의 수장인 명(明)도 있었는데 그는 민의당 담을 넘어 들어왔다고 했다.


청인의 주도로 개엄은 축시(畜時)가 지나기도 전에 해제되었다.


명과 훈은 서로 손을 맞잡았다.


개엄의 고비를 넘겼다는 안도였다.


당시 어명을 받고 출동한 군대는 착호갑사와 별무반이었다.


착호갑사는 호랑이를 잡으러 다니는 병사들이었는데 그 용맹함이 뛰어나 왕이 직접 하명하는 특수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별무반은 고려시대 때부터 활약하던 부대로서 전통과 명성을 자랑하였다.


이들은 병판 김용헌과 개엄사령관 박앙수, 대오랑캐사령관 여인영의 지시를 정신없이, 계통없이, 두서없이 받고 민의당으로 출동했다.


범(虎)의 위협과 원(元)의 강력한 군대에도 굴하지 않던 자부심이 있었는데 이날따라 병사들의 총기는 형편없었다.


적극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지 아니하고 불 꺼진 방의 창에서 창호지 뜯기, 사립문 들락날락하기 등으로 태업을 하였다.


두 부대의 지휘관들은 임금인 렬에게서도 직접 연락을 받았는데 후에 사헌부와 경국대전재판소, 의금부 국가수사본부 등에서 진술한 내용이 임금 탄핵의 불쏘시개가 된다.


민의에서 해제가 결의되자 렬은 근심에 휩싸였다.


너무 싱겁게 끝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근정전 지하의 결심실로 측근들을 불러 모았다.


"다른 방도가 없는가?"


왕이 다그쳤다.


"작금으로서는 뾰족한 수가..."


병판 용헌이 말을 흐리자 인영이 외쳤다.


"충함서당의 명예를 걸고 끝까지 전하와 함께하겠습니다!"


렬은 평소와 다르게 그의 아부도 흡족하지 않았다.


입맛을 다지며 왕이 말했다.


"술상을 들게 하라!"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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