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윤종이 선택한 곳
윤종(尹宗)이 처음부터 인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임인년 그가 가까스로 명(明)을 따돌리고 패권을 잡았을 때 백성들의 기대와 지지는 컸다.
넓디디한 용안처럼 두루 보듬는 큰 정치를 하고, 푸짐한 용체와 같이 백성을 풍요롭게 할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기대하였다.
그런데 왕좌 등극을 며칠 앞두고 그는 폭탄선언을 했다.
대대로 사용하던 인왕산 밑자락의 청와궁을 떠나 병조의 진영으로 쓰던 용산골에 새 궁을 짓겠다는 거였다.
대신들, 대간들뿐 아니라 유생, 환관, 궁녀 등 궐 내의 모든 이들이 놀랐다.
"과인은 청와궁을 백성들에게 돌려줄 것이다."
"전하, 그리 하시면 제때에 집무를 시작하기가 어렵사옵니다."
세간에서는 왕을 상징하는 용(龍)자가 들어가 있어 임금이 천도를 명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렬(列)의 반대파인 청인(靑人)뿐 아니라 홍인(紅人) 내에서도 당혹감과 반대 의견이 나왔다.
"아니다. 내 이미 마음을 굳혔으니 두 번 묻지 말라. 용산골에 새 궐이 들어설 때까지 사가(私家)에서 다닐 것이다."
"전하, 그것은 전하의 안위와 편의에도 좋지 않을뿐더러 도성 내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이옵니다."
당시 렬의 사가는 서초골의 악희로비수타(岳喜露飛水打)였다.
산이 기뻐하고 이슬이 날으며 물이 뛴다는 부유촌이었는데 주로 사헌부 관리들이 모여 살았다.
문제는 경호와 교통이었다.
서초골에서 용산골까지는 십리 안팎인데 임금이 행차를 하려면 여간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궁을 지키는 임무는 숙위군이 맡고 행차 시에는 어영청이나 훈련도감 등 금군(金軍-임금의 친위부대)이 아닌 부대들도 동원된다.
렬의 지시가 떨어진 이후 실제로 여러 군 기관이 혼선을 빚으며 갈등했다.
왕의 친위부대인 숙위군은 궁궐 수비가 주임무라며 궐 밖의 왕은 책임질 수 없다고 했고 어영청은 임금의 입퇴궐이 간헐적인 행차는 아니므로 호위를 거부했다.
백성들의 통행에 지장을 주는 것도 문제였다.
판서 이상의 고위관료들이나 대군 이상 왕족들이 (가마든 승마든) 행차할 경우 저잣거리의 행인들은 바짝 엎드려 침묵을 지켜야 한다.
오죽하면 육조대로 옆에 피맛골(避馬골-마차를 피하는 곳이란 뜻)이 생겼겠는가?
하물며 임금이 매일 같이 한양 거리를 다닌다니 그 혼란은 이루 말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영의정 한득수가 나섰다.
임금의 입출궐 전례가 없다는 지적에 그는 이성계의 예를 들어 묵살했다.
"태조 대왕께서는 왕위에 오른 뒤에도 몇 달 동안 사가에서 지내며 궁을 다녔소. 전례가 없다 함은 당치도 않소."
득수는 예조판서와 병조판서, 숙위군장와 어영청장 등을 불러 호위 임무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었다.
소속이 어디든 렬의 동선에 배치된 병사들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고생해야 했다.
더 큰 고통은 왕이 술을 마시러 다른 장소로 새거나 숙취로 입궐시간이 변경되는 경우였다.
병사들과 포졸들은 죽을 맛이었다.
임금의 동선은 극비였는 데다 예고 없이 변경되기 일쑤였다.
임금의 새 거처는 임인년 가을에서야 완성되었다.
병조판서가 기거하며 사신을 접대하던 곳을 부랴부랴 개조한 것이데 이 개조공사 또한 논란이 되었다.
"전하, 병판의 접객소를 다시 꾸미는 일에 중전마마의 측근이 부당한 이익을 취한다는 상소가 끊이질 않고 있사옵니다."
세간에 파다한 소식을 도승지가 고하자 렬은 거북함을 숨기지 않았다.
"내 급히 결정한 일인데 보통과 같은 방식으로는 처리되지 못했을 것이다. 경들은 괘념치 말라."
도아수태풍(道我首太風)이라는 새로운 문화도 생겼다.
렬이 임시 궁에 도착하면 사간원의 정육품 헌납, 정팔품 정언 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궁금한 것을 묻고 왕이 대답하는 형식이었다.
사헌부에서 죄인들만 상대하던 렬은 이 시간이 불편하고 짜증 났다.
사간원의 하급관리들이 이런저런 논평을 하며 비판적인 질문을 하는 걸 견딜 수 없었다.
왕명은 하달과 시행만 있을 뿐인데 말이다.
그래도 약속했던 것인데 안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도아수태풍은 초기 서너 달 하다가 유야무야 없던 것이 되었다.
청와궁에서 용산골로 궁궐을 옮기는 과정에서 세간의 눈초리는 더 매서워졌다.
"전하, 중전마마께서 궐밖의 무당들과 교류한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용산골 이전 역시 무속인의 말을 듣고 결정됐다는 소문이 사대문 안팎에 급속히 퍼지고 있사옵니다."
승정원뿐만 아니라 의정부 삼정승과 육조의 판서들까지 가세했다.
"경들은 도대체 누구의 편인가? 왕과 왕비가 누굴 만나든 경들과 무슨 상관인가? 이 일은 더 간하지 말라."
왕의 이 같은 태도는 대신들과 대간들을 더 위축시켰다.
정작 렬이 눈과 귀를 집중하던 곳은 따로 있었으니 유투부(遺鬪富-싸움과 부유함을 남긴다는 뜻)라는 신문물이었다.
조선 땅은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3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