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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체포 작전의 전말 上

5화 한남골 언덕은 높디높고

by 피리 피디 Mar 0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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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그렇게 식음을 폐하시면 옥체가 상하옵니다. 어서 수라를 드시옵소서."


형리(刑理)가 쟁반을 놓으며 걱정스럽게 고했다.


말이 수라지, 이건 개밥이나 다름없었다.


드문드문 콩과 조가 들어있는 밥에, 허멀건 콩나물국, 볶음멸치 몇 마리, 맥 빠진 김치 몇 조각이 전부였다.


무엇보다 윤종(尹宗)은 술이 그리웠다.


반주가 없는 식사는 목 안으로 넘기기가 어려웠다.


"생각 없다. 두고 나가거라."


가부좌를 틀어 창 쪽을 바라본 채로 렬(列)은 대답하였다.


"전하, 많은 백성들이 전하를 응원하고 있사옵니다. 부디 훗날을 위해서라도 기운을 차리셔야 하옵니다. 신은 그만 물러가겠나이다. 부디 통촉하시어 꼭 수라를 드시옵소서."


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덩달아 식욕이 오르는 느낌도 들었다.


체면 때문에 당장 문간의 밥을 먹을 수는 없지만 조금 뜸 들였다가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렬이 수감된 곳은 동부 전옥서(展獄署)다.


소위 '범털'들이 잡혀오는 곳이다.


도옥, 부옥, 군옥 등 지방 감옥과 달리 이곳은 신분이 높은 자들이 비리나 역모, 사기 등의 죄를 저질러 오는 곳이다.


대부분 독방이지만 운동시간에 다른 수감자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사교의 장이 기도 한다.


특히 사기꾼들은 이곳에 수감되기를 희망하는데 고관대작이나 거상(巨商)을 사귀었다가 출소 후 도움을 받기 위한 수작이다.


윤종은 식어가는 저녁밥을 등지고 다시 한번 창밖의 밤하늘을 바라본다.


'오늘 밤하늘은 별조차 없는 칠흑이로구나'




위벼슬아치수사처(고수처)가 임금을 잡아들이겠다고 쳐들어온 것은 새해 정월 초사흗 날이었다.


한남골 임금 관저는 가파른 언덕이다.


방문객 입장에서는 접근하기 어렵고 거주자 입장에선 내려다 보므로 우위에 있다.


세밑부터 고수처가 임금의 신병을 확보하러 올 거라는 소문이 돌았으므로 내금위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수처는 사헌부에서 파견된('물먹은'이 더 정확함) 몇몇 장위들이 일했다(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가 더 정확).


이들 역시 수재였으나 사헌부 진골들에 치여 소외감과 억울함을 느꼈다.


신라시대 육두품의 설움과 비슷한 것이다.


실력으로 겨루지 않고 출신이 주류와 비주류를 나눴는데 관악골 법학이 진골, 안암골 법학 및 관악골 기타가 성골, 나머지가 육두품이었다.


개엄 사태가 터지자 그간 차별받던 고수처 장위들은 의욕탱천하였다.


지금이야말로 사헌부 주류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해개모니(解開謨泥-문제를 풀고 새 지평을 여는 꾀)를 되찾을 기회라 생각한 것이다.


조직의 규모나 경험에 있어 이들은 무려 임금의 무려 내란을 수사하기에 버거웠다.


그리하여 택한 방도는 포도청과의 연합 작전이었다.


사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사헌부는 내란죄 수사권이 없다.


사태 초기 사헌부가 병판 김용헌을 잡아들이긴 했지만 내란죄가 아니라 직권남용죄를 적용해서였다.


또한, 피의자인 렬이 사헌부 출신인 점, 그동안 그들이 입맛대로 권한을 행사한 점, 놓아주려고 잡았다는 오해를 받는 점 등이 사헌부의 명분상 약점이었다.


고수처장 (吳)는 포도대장인 조(趙)에게 급히 전갈을 넣었다.


<대감이 이끄는 포도청의 일은 나라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고, 저희 고수처는 고관대작의 부정부패를 막는 것이오. 임금의 개엄 선포는 그 둘 모두에 해당된다 할 것인데 두 조직이 합심함으로써 나라를 바로 세움이 어떠하오?>


그러나 조 대장은 이미 사헌부에 체포된 상태였고 그의 부하인 종 3품 좌포도청장이 답신을 보내왔다.


<오 대감님 말씀이 전적으로 옳소. 비록 제가 포도대장 대행이지만 조선을 위해 결단하고자 하옵니다. 고수처가 지휘하시면 포도청은 그 뜻에 따라 수행하겠나이다>


이렇게 하여 렬의 체포 작전이 비롯되었다.


아무리 수사기관이 피의자를 잡고 싶어도 판관(判官)의 령장(領章)이 없으면 불가하였다.


고수처는 서부지방재판소에서 체포 령장을 받아놓고 (증좌인멸과 도망우려가 인정된 것이다) 시기를 저울질하였다.


아무리 내란 우두머리 피의자여도 한 나라의 원수요, 현직 임금이란 점이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꾸물거리는 오에게 청인들의 압박과 백성들의 항의, 행동을 같이 하기로 한 포도청의 재촉이 쏟아졌다.


그는 정월 초사흗날을 거사일로 잡았다.


한편, 한남골도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었다.


우승지의 휘하에는 왕의 경호를 맡는 내금위 수백 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검은 옷을 입고 짧은 머리를 하였다.


왕의 호위무사들로서 무예와 용기가 조선 팔도 최고로 꼽힌다.


"오랑캐에 포섭된 반조정세력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른다. 너희들 모두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만반의 대비를 하여야 한다."


금위군장이 조회시간에 큰소리로 명령하였다.


그러나 금군들의 반응은 뜻뜨미지근하였는데 이는 한 달 전 민의당에 출동하였던 착호갑사와 별초군들의 태도와 비슷하였다.


"나으리, 아무리 임금의 호위기관이라고 하여도 고수처와 포도청이 령장을 들고 오는데 저지할 명분이 있겠습니까? 공무집행훼방죄로 크게 처벌받는다는데 심히 염려되옵니다."


금위군 중 중간관리가 읍소하였다.


후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들은 본연의 임무인 호위뿐 아니라 임금의 생일잔치 준비, 중전의 소풍지 섭외 등 북쪽 오랑캐의 기쁨조 할 듯한 일들을 해야 했다.


왕과 왕비를 즐겁게 하기 위해 춤과 노래를 시전하는 근육질의 구척장신들을 상상해 보라!


"우리가 이러려고 호위무사가 되었단 말인가?"


금위군들의 탄식이 쌓인 터라 경호 명령에 볼멘소리가 나왔던 것이다.


초사흗날 새벽 고수처 장령들과 포도청 포졸들이 작전을 개시하였다.


한남골 일대는 임금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수천 명의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임금의 탄핵안처럼 체포 역시 첫 시도는 실패였다.


내금위가 방어막을 치고 진입을 막았는데 아예 언덕을 오르지 못하게 대형 수레를 다닥다닥 붙여놓았다.


고수처-포도청 연합은 반나절 동안 내금위와 옥신각신(다행히 충돌은 없었다)하다가 배가 고파져 철수하였다.


그들이 떠난 한남골에는 한숨만이 가득하였다.


(6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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