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노무연의 도전과 비극적 말로
경국대전심판소의 윤종(尹宗) 탄핵 결정이 지연되는 틈을 타, 조선 왕 탄핵 사례를 개관해 보고자 한다.
35대 임금 노종(盧宗), 그는 누구인가?
본디 그는 경상도 김해 출신의 율사(律士)였다.
이름은 무연이었는데 휘발유와는 무관하다.
찢어지게 가난하여 성균관은커녕 지방의 서원에도 다니지 못하였다.
그러나 소싯적부터 머리가 총명하여 독학으로 율사가 되었고, 의협심과 정의감이 투철하여 동래 지역에서 인권율사로 이름을 떨쳤다.
당시 재야 거물이었던 김영상 총재(후에 삼십삼 대 임금으로 등극한다)의 추천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민의(民議)의원이 된다.
당시는 무인정권 시절이었다.
수년 전 병사를 일으켜 시민들을 죽인 전직 임금(삼십일 대 全祖)의 청문회에서 그는 명성을 떨친다.
그러나 이후 그의 정치 역정은 험난하였다.
김영상 총재의 삼당 야합을 반대하여 찌그러지고, 당선이 가당치도 않은 종로에 대들어서 깨지곤 하였다.
특히 당시에는 지역감정이 컸는데 그걸 깨보겠다고 무모한 도전을 일삼았다.
바보 소리를 들으면서도 꾸역꾸역 자기 길을 개척한 결과, 임오년 겨울 극적으로 삼십오 대 임금 자리에 오른다.
그에게는 서원에는 못 가고 서당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달렸는데 때문에 많은 신하들이 그를 우습게 보았다.
특히 수재 중의 수재라 자부하는 사헌부 관리들은 국격과 나라의 위신을 운운하며 혀를 찼다.
사헌부 출신도 아니고 심지어 남자도 아닌 금실이가 형조판서에 지명되자 난리가 났다.
토론을 좋아하던 무연은 반대하는 사헌부 장령들을 모아 대화를 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왕을 향 그들의 태도는 가히 여염집의 행랑아범을 대하듯 하였다.
"전하의 서원 입학 연도는 어느 해이옵니까?"
"신들을 토론으로 제압하심은 부당하다 여겨지옵니다"
등과 같은 저항과 비아냥이 쏟아졌다.
"경들은 이쯤 하면 막 가자는 것이오?"
왕이 참다못해 던진 이 말은 팔도 백성 모두가 따라하는 유행어가 되기도 하였다.
그가 민의에서 탄핵을 당한 근원적 사유도 비슷하였다.
왕의 언행이 지나치게 가볍고 기존의 질서를 위협한다는 것이었다.
"임금 노릇 못 해 먹겠다."
이런 푸념도 스스럼없이 하곤 했는데 젠체하는 벼슬아치들은 이 같은 임금의 태도에 아연실색하였다.
사실 그는 의욕과 포부가 매우 큰 임금이었다.
사학(私學) 개혁, 사헌부 혁신, 한양 천도, 호주제 폐지 등을 강하게 몰아붙이자 사회 주류 세력이 불편함을 느꼈던 것이다.
소위, <좋은 게 좋다>의 논리로 돌아가던 시절에 <아닌 건 아닌> 임금이 나타났던 것이다.
홍인 주류뿐 아니라 청인 내에서도 그의 튀는 언행에 반감을 가진 자들이 적지 않았고, 결국 그는 "청인이 표를 많이 얻으면 좋겠다"는 한 마디를 빌미로 탄핵소추 되었다.
'벼슬아치선발법' 위반이라는데 지금 적용했다면 윤종은 수백 번 탄핵되었을 사유다.
민의 결정으로 무연은 직무가 정지되었는데 두 달의 심리 끝에 경국대전심판소에서 기각함으로써 다시 옥쇄를 쥐었다.
돌아온 노종은 그러나 한풀 꺾인 모습이었다.
민의당에서 우호세력인 황인(黃人)인 열린우리당(悅隣宇利堂)이 약진했음에도 예전만한 패기가 없었다.
그는 대연정 제안으로 활로를 모색했으나 그마저도 정적들에게 거부당하고 홍인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만다.
임기를 마치고 노종은 고향인 김해 봉아마을로 돌아가 오리 벼농사를 지었다.
"임금님, 나와 주시옵소서!"
그의 퇴임 후 많은 백성들은 봉아의 사저를 찾아갔다.
인기는 임금 자리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높았다.
삼십육 대 패권을 쥔 이는 상인 출신의 한성판윤 이영박이었다.
당시 조선 팔도는 돈을 버는 것에 혈안이 돼 있었고 부자가 되게 해 준다는 약속에 영박을 왕좌에 앉혔다.
그러나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노종 무연의 비리를 캐는 것이었다.
사헌부를 동원해 노종이 친하게 지내던 상인에게서 뇌물을 받았다는 식의 소문을 흘렸다.
한 차례 봉아마을에서 사헌부까지 끌려가 국문을 받기도 하였다.
노종은 수치심과 자책감을 견디지 못해 두 번째 취조를 앞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봉아마을 사저 뒤편의 부엉이 바위언덕에서 몸을 던진 것이다.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너무 미안해하지 말거라. 생사가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니라. 운명이다."
이런 유서를 남겼다.
많은 백성들은 밀짚모자를 벗어 인사하던 수수했던 전직 임금을 추모하였다.
훗날 사관들은 노종 무연을 지나치게 앞서간 임금으로 기록한다.
그를 본보기로 한 활동사진도 나왔는데 제목이 '변호인'이었다.
노종은 권위주의 시대에 마침표를 찍고 진정한 민본주의를 이끈 군주로 평가받는다.
(8편에서 계속 - 근혜군의 탄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