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25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탄핵의 역사 下

8화 근해군의 기구한 운명과 영욕

by 피리 피디 Mar 19. 2025
아래로


삼십칠 대 임금은 근해군(君)이다,


탄핵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여 묘호(墓呼) 없다.


조선의 유일한 여왕이며 아버지의 대를 이은 군주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십구 대 임금인 박종(朴宗)이었는데 무인 출신으로 군사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십팔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통치하다가 최측근 신하에게 암살당하였다.


박종이 시해되기 오 년 전에는 중전인 옥천왕후 육씨가 죽었다.


왜의 통치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는 행사 자리에서 북쪽의 오랑캐가 보낸 자객이 육씨를 총살하였던 것이다.


너무나 허술한 방비와 당황하지 않던 임금의 태도 박종의 자작극 내지는 암살 사주라는 뒷말도 돌았다.


어쨌든 근해는 이후 큰 영애(令愛)로서 아버지를 내조하는 역할을 맡았다.


아버지의 피 뒤에 전조(全祖) 정권이 들어섰는데 역시 역시 군사를 일으킨 자들이었다.


반정의 우두머리였던 두완(삼십일 대 왕)의 배려로 근해는 그다지 궁핍하지 않은 야인 생활을 하였다.


전조는 근해에게 육억 냥이라는 큰돈을 주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강남의 기와집 백 채 값이었다.


사실 아버지의 금고 속에 있던 것들 중 극히 일부였으니 근해 입장에서는 그다지 고맙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매(妹)와 제(弟)가 한 명씩 있었는데 근녕과 시만이었다.


동생들은 철이 없어서 사기 행각에 연루되거나 아편 비슷한 약에 취하기도 하면서 선친의 명성에 먹칠을 하였다.


그러나 근해만은 행실이 반듯하여 정계에 입문하였을 때 뭇 백성의 기대와 지지를 크게 얻었다.


"법과 원칙에 따라....."

 

그녀의 말은 당시 조정의 행태에 반감을 가진 백성들에게 신선함을 주었다.


반칙을 일삼으며 소통에 문제가 있어 보이던 이종(李宗) 영박에 반해 그녀의 올곧음은 백성의 환심을 샀다.


아버지의 후광도 그녀가 패권을 쥐는 데 도움을 주었다.


많은 백성이 박종 시절 살림살이가 나아진 것을 기억하였고, 그 딸인 근해에게 부흥의 기대를 걸었다.


동정심도 컸다.


어린 나이에 양친을 모두 잃고 두 동생의 일탈마저 감당해야 했던 그녀에게 백성들은 옥쇄를 안겨주었다.


"쯧쯧, 저런 곡절이 어디 있담? 총탄에 부모 모두 여읜 뒤 시집도 못 가고 나랏일을 한다는데 우리가 도와주지 않으면 대역죄여. 암, 선왕께 할 짓이 아닌게라."


그리하여 청와궁을 떠난 지 삼십삼 년 만에 공주에서 여왕으로 돌아온 것이다.




백성들이 그녀의 무능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백성들은 너그러웠다.


"솔선을 수범하고, 부지런한 벌꿀과 같이, 이산화개스를 줄이고..."


이런 말실수조차 정상적이지 않은 성장 환경의 발로라고 두둔하는 것이었다.


국가 비전은커녕 각종 현안에 대한 인식과 공부가 부족하여 기자회견이 늘 살얼음 걷는 듯하였다.


허나 일국의 왕이 세간의 평 하나하나에 휘둘려서야 되겠는가?


근혜군 즉위 이년 차에 탐라로 가던 배(世月號)가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경기 안산의 서당 학생들 포함, 이백 명이 넘게 익사하였다.


사고 자체도 의문이 많았지만 근해군의 행적도 수상하였다.


온 백성이 발을 동동 구르며 기도하던 시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일곱 시간 만에 부스스한 모습으로 나타난 여왕은 때 지난 헛소리를 늘어놓았는데 신하들과 백성들은 아연실색하였다.


백성의 안녕을 최우선으로 일해야 할 군주가 집무실인 근정전에도 없었고(문조 정권 출범 후 수사 결과 그때 최숭실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신하들이 여러 차례 올린 장계조차 묵살했다는 사실이 그녀에 대한 실망감을 키웠다.


다시 이 년 후, 세간에 잠복하던 이상한 소문이 떠올랐다.


정윤홰라는 자가 청와궁의 환관 세 명(문고리 삼인방)을 통해 국사를 좌지우지했다는 것이다.


당시  최숭실이란 여자와 이혼한 직후였는데 그녀는 최태만이라는 사이비 종교 지도자의 딸이었다.


또한 최태만은 박종이 살아있을 때 매우 신뢰하던 사람인데 영애였던 근해와도 모종의 은밀한 관계였다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여왕은 조정의 권력 서열 삼위다. 이위는 정윤회고 일위가 최숭실이다."


이 같은 소문은 청와궁의 공식문건이 발각되면서 사실로 드러난다.


이른바 비선실세 논란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민심은 시큰둥하였다.


사인(私人)이 청와궁을 드나들었다고 한들 미혼의 여왕이니 외로워서 그랬겠거니 싶었던 거다.




그러던 와중에 문제의 그 태불리피시(太不利彼是)가 세상에 알려졌다.


<크지도 않으면서 이것저것 이로움을 주는 기기>란 뜻인데 그 안에 최숭실과 근해군의 일들이 모조리 담겨 있던 것이다.


임금의 말씀자료를 숭실이가 고치고, 조정의 기밀사항에 대한 언급이 들어있었다.


"나도 연설문 쓸 때 벗의 도움을 받곤 하오."


당시 홍인 수장이 근해군을 엄호한답시고 말했는데 불난 민심에 기름 붓는 격이었다.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이후 특별대사헌의 수사로 여왕의 허수아비 행각, 즉 숭실의 수렴청정 놀이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최숭실은 보안 검색도 없이 임의롭게 청와대를 들락거렸고, 온갖 부당한 영향을 행사하였다.


조카가 연루된 미르운동재단을 통해 이권에 개입하였다.


정율아가 말을 탔는데 거상(巨商)들을 협박하여 명마를 갈취하기도 하였다.


예인(藝人)을 임의로 분류하여 우호적인 쪽에만 지원하고 반대편은 끊어버린 이른바 불래구리수트(不來舊利手鬪)정책도 드러났다.


"내가 이러려고 왕위에 올랐나 자괴감이 드는도다."


근해군은 사과회견에서 대백성하소연을 시전하였고 꼭두각시 임금에게 실망한 백성의 수는 늘어만 갔다.


그해 병신년 겨울은 병신년을 파면해야 한다는 외침으로 가득하였다.


민의에서는 반대파인 청인뿐 아니라 홍인 내에서도 탄핵 불가피론이 흘러나왔다.


근해군의 초상화만 걸면 가슴에 금훈장을 달 수 있던 것이 불과 이년 전이었다.


그때는 친박이니 진박이니 하며 충성 경쟁을 하더니 이제는 홍당 다수가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

 

결국 민의는 탄핵안을 통과시켰고 경국대전심판소는 이듬해 삼월에 근해군을 파면한다.


파면 결정을 발표한 심판소장은 여인이었는데 입궐 길에 분홍색 구루프를 달고 와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근해군은 이후 형사재판을 받아 뇌물죄, 직권남용죄 등으로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파면 선고 육십일 이내에 다음 왕위 계승자를 뽑아야 하는 법령의 규정에 따라 문조(文祖) 제인이 등극하였는데 신유년 오월의 일이다.




근해군의 파면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는 이유는 이러하다.


지금 진행 중인 윤종의 탄핵은 팔 년 전 근해군 파면의 연장전이라 해도 무방하다.


홍인들은 민심에 떠밀려 너무 쉽게 왕을 저버렸다는 반성을 하였다.


이후의 정쟁에서 모두 패하였기 때문이다.


'잘못했어도 버티는 것이 사는 길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윤종 사태에서 홍인이 뭉쳐 있는 이유가 된다.


어디까지나 결과론이요, 상대적인 것이지마는 죄질로 따지면 렬이 근해보다 심하다는 의견이 많다.


그럼에도 윤종은 홍인 무리의 옹호를 받고 있다.




두 편에 걸쳐 노종과 근해군의 탄핵을 살펴 보았다.


노종 탄핵은 역풍을 불러와 임금이 복귀하였을 뿐만 아니라 친위 세력인 황인(黃人)이 대거 등용되는 결과를 낳았지만 근해군은 무참히 왕좌에서 끌려 내려왔다.


어찌 보면 역사란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다 범하는 잘못의 연속이다.


바야흐로 렬과 조선 운명이 결정될 시간이 다가온다.


(9화에서 계속)




수, 토 연재
이전 07화 탄핵의 역사 上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