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실종과 고소고발의 흥행
을사년의 봄은 바람이 몰고 왔다.
경상도 의성에서 큰 불이 났는데 거센 마파람이 불을 키웠다.
불은 인근의 안동과 산청, 동해안의 영덕에까지 번졌다.
여러 사람이 죽었고 특히 움직임이 더딘 노인들이 화마에 희생되었다.
김수헌이란 미남 광대를 비난하는 바람도 거셌다.
아낙 광대인 김새롱이 스스로 목숨을 버렸는데 백성들은 수헌과 정분이 났던 일과 연관 지어 생각했다.
새롱이 약관(約冠)이 되기 전부터 정을 통한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었다.
명성이 하늘을 찌를 듯하던 유명 광대가 여자애를 노리개 삼았다고 하여 팔도에 비난과 분노가 들끓었다.
반면, 남녀상열지사가 저어되는 시대도 아니고, 교제가 성적 결합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라며 두둔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해 봄바람 중 가장 거센 것은 각종 심판소를 둘러싼 바람(願)이었다.
우선, 명(明)이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하직원을 모른다고 하고, 골후를 함께 하지 아니하였다는 허위 진술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골후(骨厚)는 정월에 하는 아이들의 자치기와 비슷한데 부유한 상인들이나 고관대작이 즐기는 사교 놀이다.
일차 판결은 유죄였으나 이차 판관은 죄를 물을 수 없다고 판결하였다.
"골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같이 찍은 사진이 왜곡되었다고 주장한 것을 거짓 진술로 볼 수는 없으며 민의 선거에 당선될 목적은 아니다."
이것이 명의 주장이었고 고등 판관은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조선은 곧 사필귀정이라는 쪽과 부당 판결이라는 쪽으로 나뉘었다.
청인(靑人)은 사소한 실수와 말꼬리를 붙잡아 감옥에 처넣으려는 윤종과 사헌부의 보복 행위가 실패로 돌아갔다며 사헌부 개혁을 주장하였다.
홍인(紅人)은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이며 이렇다면 앞으로 벼슬하려는 자들의 거짓말을 무슨 수로 벌할 것인가 개탄하였다.
어찌 되었든 명의 대권가도에는 청신호가 켜졌다.
이런 와중에 윤종의 탄핵 심판은 계속 늦춰지고 있었다.
사건을 맡은 북촌의 경국대전심판소를 보자.
이 관청은 매우 중요한 국가지대사를 관장한다.
붕당 해산 명령, 고위 벼슬의 파면, 백성의 쟁(爭)에 대한 판단, 탐관오리의 탄핵, 경국대전 불합치 법률 심판 등이 임무다.
본래 아홉 명의 판관을 두어야 하는데 심판관은 임금과 민의, 대판관 등이 세 명씩 지명한다.
그러나 서로 충돌만 할 뿐 협의가 없어진 터라 판관 임명도 내내 겉돌았다.
게다가 동짓달 개엄의 여파로 자기네들의 이해관계가 중요해지자 심판관 임명을 둘러싸고 온갖 주장이 충돌하였다.
청인은 심판관 임명을 거부하는 임금 대행들을 탄핵했고, 그 판단은 다시 심판소에서 내렸다.
자가당착이요, 순환참조에, 뫼비우스의 띠,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의 연속이었다.
정치로 해결이 안 되니 판관에게 미루고, 그 결과를 가지고 또 싸움질을 해대는 것이다.
그 와중에 영의정 한득수는 탄핵이 기각되어 다시 임금 대행 자리에 복귀하였다.
"이 판결은 경국대전을 만든 세종대왕과 성종대왕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오. 렬의 사건은 차일피일 미루면서 득수의 일은 왜 엉뚱하게 처리한단 말이오?"
청인의 반발은 극심하였고 고조된 위기감 때문에 천막 당사, 단식, 삭발, 집회 따위가 횡행하였다.
돈 세는 주특기가 있는 대행의 대행 최상묵은 뻘쭘하게 되었다.
그 역시 청인에 의해 탄핵의 위기에 몰려 있었다.
거북권은 윤종만큼이나 써댔고 심판관 임명은 고집스럽게 거부하던 차였다.
득수가 복귀함으로써 상묵은 더 이상 임금 노릇을 못하게 되었다.
탄핵당한 것과 비슷한 처지가 된 셈이다.
만약 렬(列)이 복귀한다면 한득수 역시 강등될 터이다.
한두 등급씩 올랐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임금 노릇을 이렇게 돌아가며 해 먹는 일은 조선이 예의와 겸양지심이 중한 나라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갑진년에는 경사도 있었다.
아낙 문인 헌강이 노배루문학상(路配樓文學償)을 탄 것이다.
만국의 백성들이 그녀의 작품을 각자의 말글로 바꾸어 읽었다.
그런데 그녀를 위시한 많은 문인들이 개엄으로 나라를 어지럽게 한 윤종의 탄핵을 주장하였다.
"훼손되지 말아야 할 자유, 평화, 생명의 가치를 믿소. 렬의 탄핵은 이같은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일이오." 라고 썼다.
이처럼 식자층에서는 윤종이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만약 그가 왕위에 복귀한다면 훨씬 더 무서운 짓을 저지를 거라 경고하였다.
이제 아무도 판관의 결정을 무겁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 뜻과 다른 판결은 불의요, 부당지사인 것이다.
윤종에게 처음 령장을 내어준 날, 한양서부재판소는 폭도들의 침입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관청이 분노한 백성에 의해 침탈되고 파손된 것은 임진년, 선조가 가장 먼저 도망한 이후 처음이었다.
렬과 홍인은 이들을 진정시키기는커녕 독려하거나 두둔하였다.
당장 나라가 두쪽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형국이었다.
바야흐로 내란 사태는 내전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11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