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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리하게 벼려진 칼날

11화 명의 기사회생과 안갯속 정국

by 이지완


명(明)은 누구인가?


잠룡(潛龍) 중 가장 먼저 날개를 단 청인(靑人) 수장이다.


그는 임인년 렬(列)에게 박빙으로 패하여 용포를 입지 못하였다.


짪은 와신상담의 세월을 보냈는데 당내 영향력은 여전하여 곧 당수 자리를 꿰찼다.




그는 본디 경상도 안동 출생인데 일찍 상경하여 경기도에 자리 잡았다.


형편이 어려워 온갖 잡일과 학업을 병행하였고 머리가 뛰어나 율사시(律士試)에 합격하였다.


돈이 없는 학생이나 양천민 노동자의 변호를 맡아 경기지역에서 인권율사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삼십오 대 임금 노종(盧宗)과 비슷하다 하겠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중앙 정계로 진출한 노종과 달리 명은 지방 수령직을 선택하였다.




경기 성남(城南)은 남한산성 아래쪽에 자리한 작은 고을이었다.


병인년의 수치 때문인지 산성의 남쪽에는 오랫동안 사람들이 살려고 하지 않았다.


한양의 사대문 안쪽이 미어터질 듯 커지면서 힘없는 평민들이 밀려나 경기 외곽에 자리 잡았다.


성남의 언덕배기는 한양에서 쫓겨난 서민들로 가득하게 되었다.


두완 전종(全宗) 시절까지 성남은 비루한 자들의 도시였으나 우종(愚宗), 삼조(三祖), 중조(中祖) 기간을 거치며 빈부가 섞이기 시작하였다.


분당(粉堂)이란 신고읍이 탄생한 것인데 '가루가 될 때까지 분골쇄신해야 집 한 채 얻는다'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렇게 하여 생겨난 곳들이 분당, 일산, 중동 등 경기지역에 여럿이었다.


가난한 원주민과 부유한 입주민이 혼재되어 신도읍은 독특한 성격을 띠게 되었다.


분당은 성남의 한 마을이지만 지금까지도 '성남 산다'라고 하지 않고, 일산 백성들도 '고양에 산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부심인지 차별의식인지 조선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우월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구도읍과 신조읍, 부와 빈, 지주와 소작농, 기업가와 노동자가 섞이면서 성남골 내에 갈등도 커져갔다.


이런 상황에서 인권율사 명은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섰다.


자연히 여러 백성단체와 교류하게 되었고, 이들을 지지기반으로 하여 성남 수령에 당선된다.


명은 하던 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부조리한 관행을 참지 못했고 새로운 방식으로 일하였다.


신임 수령 덕분에 성남은 부유하고 편리해졌을 뿐만 아니라 팔도의 숱한 고을들 중 여러 평가에서 일등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의 지혜와 용기는 금세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다.


"성남골 사또가 그렇게 일을 잘한다우. 인품도 시원시원해서 더 큰일을 맡겨도 되겄어."


사람들의 칭송이 커져가는 것과 더불어, 시샘과 모함, 추문도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명 사또가 김부전이라는 여광대랑 상열지사 관계였다네."

"형수한테 욕설 퍼부었다는 소리 들었는가?" "동방예의지국에서 사또라는 자가.. 아이고 흉측하고 민망해라."


그러나 명은 아랑곳하지 아니하였다.


근해군이 파면된 뒤 치러진 정유년에 대권 도전을 선언한 것이다.


"아니, 일개 고읍 사또가 옥쇄를 쥐겠다고? 당찬 건지, 무모한 건지.."

"삼정승이나 판서도 아니고, 심지어 관찰사도 아닌 고작 고을 수령이 왕관을?"

"노종(盧宗)의 심복인 제인이 용상에 오를 것이 뻔한데 무슨 심산으로 저런대?"

"차기나 차차기를 노리고 이름이나 알려보려고 그러는 거겠지."


당시 청인 내에서는 문제인 뿐만 아니라 한성판윤 박원손, 충청 관찰사 안희성 등이 경쟁하였는데 역시 예상대로 문조가 이겼다.


십 년 만에 다시 정권을 탈환한 기쁨도 있었으나 청당 내에는 향후에도 계속 권력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가득하였다.


백성들에게 인기 있는 세 사람, 즉 원손과 희성, 그리고 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건전한 경쟁이라면 홍인의 도전을 가뿐히 물리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문조 시절 원손은 스스로 자초한 추문을 못 이기고 자결하였다.


희성 역시 데리고 있던 나인(內人)이 상열추문을 폭로하면서 옥에 갇히고 말았다.


청인은 더불어 희롱당이란 오명을 안게 되었고 국(國) 사태와 부동산값 폭등 등의 여파로 신예 렬에게 용상을 넘겨주었다.


명과 청인에게 패배는 뼈아팠다.


사실 렬은 문종과 청인이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자였다.


게다가 실력으로 치면 허술하기 그지없는 렬에게 명이 질 이유가 없었다.


이러한 아쉬움 때문에 청인은 또다시 명을 택한다.


만약 원손과 희성이 건재했다면 패장인 명은 다시 일어서지 못했을 수도 있다.




철치부심한 명은 렬을 맹공하기 시작한다.


렬과 건(乾)의 약점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과거지사도 그럴진대 대권을 잡은 이후에도 술, 땅, 재산, 인사개입, 외교, 말, 태도 등 헛발질의 연속이었다.


계묘년에 치러진 민의 선거에서 명과 청인은 렬과 홍인을 압승한다.


이때 차지한 일백칠십 석의 대다수는 명의 측근들이었다.


공천 과정에서 자기에게 반(反)하는 자들을 대폭 제거하였기 때문이다.


내홍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명은 버티면서 눌렀다.


명의 주도면밀한 지휘 아래 친정체제를 갖추었고 당내에서 그의 입지는 더욱 강건해졌다.




가세가 기울면 가장은 냉정하게 상황을 돌아보고 수습책을 도모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럴 능력이 없으면 한방에 역전을 하려고 든다.


렬은 지난 동짓달 사흗날 이 같은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정적을 일거에 척결하려다 전옥서에 갇히고 경국대전심판소에서 탄핵을 판결받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렬의 자폭성 개엄과 고등판관의 무죄 판결로 명의 왕좌 등극은 더 가까워졌다.


청인 안에서, 홍인까지 넓혀 보아도 그의 적수는 없어 보인다.


조선 역사상 가장 호불호가 선명한 인물, 명!


그가 벼려온 칼날은 어디로 향하고 얼마나 예리할 것인가?


을사년 조선의 봄은 어느 방향로 흐를 것인가?


(12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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