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기괴하고 파란만장한 기싸움
조선의 봄은 흉흉한 소식이 열었다.
충청도 한밭의 한 서당에서 어떤 스승이 여덟 살 제자 아이를 찔러 죽이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
또한, 북쪽 오랑캐와 인접한 경기 북부 땅에서 전투용 날틀이 민가에 포탄을 떨어뜨려 많은 사람이 다쳤는데 병사의 실수로 드러났다.
유난히 폭설이 자주 내렸고 조정은 여전히 빨간색과 파란색의 대립으로 어지러웠다.
동짓달과 섣달만큼은 아니지만 렬(列)을 지지하는 백성과 반대하는 세력이 곳곳에서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충격과 피로가 쌓여가던 삼월 이드렛날, 놀라운 소식이 들렸다.
한양중앙재판소 판관이 정월 초 잡혀온 임금을 풀어주라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법전의 규정이 모호하나 이럴 때는 아직 형을 확정받지 아니한 죄수의 입장을 더 고려함이 옳다."
사헌부가 구속 기간을 넘겨서 왕을 잡아놓고 있었으므로 죄가 있고 없음을 떠나 일단 석방함이 옳다는 거였다.
재판에 넘겨야 하는 법 기준을 날짜가 아니라 시간으로 따져야 한다며 그간의 관행을 깨고 석방을 명한 것이다.
게다가 고수처(고위벼슬아치수사처)와 기소권을 가진 사헌부가 임의로 구속기간을 쪼개 썼다는 것이 판단의 이유였다.
사헌부 대사헌과 수사를 맡은 집의와 장령들은 긴급회의를 통해 갑론을박을 했으나 꼬리를 내리고 풀어주는 선택을 하였다.
그 사이 잠깐 민생 경쟁을 하던 정국은 다시 불붙었다.
"임금을 체포하고 재판을 진행하는 과정이 모조리 불법이었는데 이제 그중 하나라도 바로잡히니 만시지탄이지만 잘된 일이다."
홍인(紅人) 주류는 매우 기뻐하며 곧 있을 경국대전재판소의 임금 탄핵에서도 윤종의 손이 들리길 기대하였다.
"아니, 판관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역모 우두머리를 풀어줬다는 말인가? 그토록 죄수의 권리를 고려하자고 할 때는 무시하더니 왜 하필 가장 큰 범죄자만 봐준단 말인가?"
청인(靑人)은 당혹스러워하며 코흘리개만도 못한 사헌부의 산수 실력을 개탄하였다.
풀어준 판관도 그러하나 사헌부의 결정도 청인들의 분노를 샀다.
"소신껏 결정한 일이외다. 즉시항고를 한다면 또 경국대전심판소의 제척을 받게 될 것이오."
대사헌의 주장에 청인과 백성들은 공격을 멈추지 아니하였다.
"시간 계산을 잘못하여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응당 책임지고 물러나야 할 것이오. 고의로 그랬다면 범죄 우두머리를 감싸고 돈 것이므로 그 또한 물러날 사유일 것이오."
이 판결로 인하여 렬은 한남골 궁으로 돌아갔다.
전옥서 밖에 있던 지지자와 관저 앞에서 기다리던 백성들에게 환하게 웃으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기도 하였다.
정작 임금의 지시를 받고 작전을 시행한 자들은 여전히 옥에 갇혀 있는데 시킨 사람은 풀려나고 명령을 이행한 자들은 구금되어 있는 기묘한 형국이다.
한편, 팔도의 전옥서 수감자들은 매우 고무되었다.
대부분이 날짜로 열흘을 채워 재판에 넘겨진 자들인데 임금 덕에 풀려날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특히 렬의 비밀을 쥐고 사헌부와 거래하던 경상도의 명대균은 자신도 풀어달라며 시위하였다.
어쨌든 윤종은 체포된 지 쉰이틀 만에 동부전옥서에서 풀려나 한남골 관저로 돌아갔다.
사실 윤종은 정월 열닷새 체포되는 순간부터 온갖 종류의 소(訴)를 올려 풀려나기를 도모하였다.
법전에 올라 있기만 할 뿐 개국 이래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방식이었다.
조선의 내로라하는 율사(律士)들조차 들어보지 못한 해괴한 조문들이었다.
입직 후 사헌부 장령과 집의, 대사헌으로서 죄수를 잡던 경험을 렬은 자신을 위해 십분 활용한 것이다.
그가 풀려나자 당황한 것은 청인뿐이 아니었다.
궁에서 독수공방 하던 건(乾)도 당황했다는 구설이 돌았으나 참인지 알 길은 없다.
홍인 중 다음 대권을 노리던 자들도 입장이 곤란해졌다.
왕의 파면이 결정되면 두 달 안에 다음 임금을 뽑아야 하는데 자신의 얼굴과 생각을 알리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때문에 겉으로는 렬을 지지하지만 경국대전심판소가 탄핵 결정을 내리면 재빨리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던 차였다.
다시 윤종의 시간으로 돌아가면 이들의 시간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중에 두 달의 칩거를 깬 훈(訓)도 있었다.
<백성이 먼저올시다>라는 서책을 써서 들고 나왔다.
사대문 안의 백성들은 그를 지지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궁금해서 책을 사고자 하였다.
주문이 밀려 필사공들이 바빠졌다.
홍당 내에 훈을 따르는 자들은 십여 명이었다.
백 여덟 중 십 할도 되지 않는 소수파였으므로 정월, 당수 탄핵 과정에서도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윤종의 잘못이 명확하므로 훈에게 기회가 올 것이라 믿고 있었다.
한편 청당 수장인 명(明)은 민심조사에서 항시 선두였다.
렬이 풀려나기 전까지 그는 백성의 살림을 챙기는 행보를 보였다.
저잣거리에서는 그가 벌써 왕이 된 것처럼 행동한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정쟁을 하면 싸운다 하여 욕을 해대고 민생을 돌보면 왕 노릇이라 욕을 하니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하소연을 하였지만 욕설로 치면 조선 팔도에 그를 능가할 자가 별로 없었다.
수년 전 가족 간에 주고받은 욕설 때문에 그를 싫어하는 백성이 많았다.
"대대로 종묘사직을 모시는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저런 자가 권력을 쥐는 것은 절대 아니 된다."
이것이 그를 반대하는 논리였다.
재판에 넘겨져 있다는 점도 대권행의 걸림돌이었다.
"모든 죄는 왕의 의중에 따라 사헌부가 뒤집어 씌운 것으로 나는 결백하다."
시종일관 이렇게 주장하였으나 몇 개의 재판에서 이미 그는 유죄를 받은 터였다.
그를 추종하는 청인들은 명의 판결은 최대한 늦어지고 렬의 파면이 신속히 결정되기를 희망하였다.
일단 옥쇄를 쥐게 되면 모든 재판은 멈추도록 경국대전에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섬진강 매화꽃이 피었다는 소식이 들렸으나 얼어붙은 정국은 풀릴 기미가 없었다.
(7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