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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닐 Nov 12. 2023

겨울이 되면 독일 생각이 난다

19년도 내가 지내던 프랑크푸르트 


요즘은 필름 값이 말도안되게 비싸져서 잘 못찍지만.. (도대체 어떻게 안되는건가요? 돌아버리겠어요) 19년도 까지만 해도 자주 찍고 다녔다... 묵힌 사진들은 많은데, 각잡고 글을 쓰자니 부담스러워서.. 안쓴지가 오래되었다. 이제부터는 그냥 부담가지지말고 아무렇게라도 써놔야지. 안그러면 정말 기억에서 다 지워져버릴것만 같다. 

오늘 볕도 잘드는데 아무데도 안나가고 집에 앉아있자니, 독일 살던 때 사진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이상하게 매년 겨울이 되면 독일 생각이 난다. 

내가 체감하던 독일의 생활이 춥고 외로웠나? 

거리가 회색빛이 되고 해도 빨리 져버리고, 공기가 차가워져서 살결이 아릴때의 그 독일의 겨울.  

언제나 조금은 건조하고 쓸쓸했던 그때가 그리워진다. (왜 그리워지지? 그냥 쓸쓸했는데.)


내가 살던 곳 (15명의 독일인들과 함께 살던 쉐어하우스같은 집..) 의 몇층이더라.. 5층 공용공간..

2-3명씩 팀을 나눠서 돌아가면서 집안일을 담당하는 것이 이 집의 규칙이다. 

저녁 당번들이 알아서 공용 돈으로 장을 봐오고 저녁을 해주면 나머지는 맛있게 먹고. 그 당번들이 설거지도 한다. 저 공용공간에 커다란 나무 테이블에서 다같이 저녁을 먹었다. 

아 친구들 잘 지내려나.. 다들 나보다 훨씬 어른들이어서, (나이대가 다양했다)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지는 못했지만 (이 때 내 사회성이 한심했음..) 그래도 다들 친절했다. 특히 나랑 같이 저녁당번 자주하던 머리 짧은 그 언니나, 방을 빌려줬던 프리츠가 자주 생각난다. 자기 옷 얼마든지 입어도 된다고, 쌍엄지 치켜세우면서 웃던 그 모습이 왜이렇게 잊혀지지가 않지? 그래서 프리츠 후드집업 입고 동네달리기 하러가기도 했는데. 

그 공용공간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공용공간 층에서는 테라스로 나갈 수도 있었다.

사실 이 건물이 그냥 쉐어하우스는 아니고, 어떤 사회운동을 같이 하는 공동체의 쉐어하우스였다. 대부분이 사회, 교육계열 박사과정에 있거나 교수거나 석사거나 그랬다. 가끔 시위도 나가고. 그때의 나는 사회 정치에 아는게 많이 없어서, (그것에 심도있게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영어가 특출나지도 않았음) 그들이 자주 얘기하던 토픽에 쉽사리 끼지 못했다. 아무튼 진보성향이 엄청난 사람들이라 이런 거주형태가 가능했고, 나에게도 그렇게 다정하게 대해준것같다.. 그 다정함을 감사히 여기고 더 함께하고 얘기하려고 노력했다면 더 좋았을텐데. 내가 잘 모르는 것에 어색하게 끼여있는것을 잘 못 견뎠던 것 같다. 다시 살라고 하면 좀 더 나을텐데! 


프푸에서 대학원을 막 다니기 시작했던 푼다. 다른 지역에서 온터라 이 지역에 대해 잘 모르고, 친구도 거의 없었다. 우리는 예술을 좋아하는 공통점이 있고 이 친구도 아시아의 문화와 역사에 이해가 높았기 때문에, 자주 만나서 즐겁게 놀았다. 

얼마전에 푼다가 한국에 여행왔는데, 우리는 원래 예정된 날보다 이르게 전날 저녁에 만나게 되었다. 자기 남자친구를 데리고 왔기때문에 나도 우리집 금쪽이를 데리고 가서 넷이서 만났다. 용산에 있는 그린호프집에서 마침 한일전 축구경기를 보면서 치맥을 즐겼다. 

정말 기분이 이상했다. 그 시절 독일에서 보던 친구가 5년뒤에 갑자기 한국에 와서 나랑 대화하다니. 그리고 이제 우리는 둘다 학생이 아니고 진짜 직장인이 되었고.. 그때는 없던 소중한 짝지를 데리고 왔다는게. 

거의 5년만에 만나는 푼다라니.. 세월이 왜이렇게 빠른건지, 약간 울고싶다. 


푼다가 자기 집에가서 파스타 해준다고 해서 푼다의 동네로 가는 길에 찍었던 사진

아마 이 날이 우리가 만날 수 있던 마지막 날이었다. 그래서 푼다는 집으로 초대해서 파스타를 만들어줬는데. 

동그랗고 하얀 치즈 (를 뭐라고 하더라?) 와 작은 토마토, 바질이 들어간 파스타였다. 


푼다 집에서 저녁까지 놀다가 내가 약속 장소로 혼자 무슨 커다란 쇼핑몰을 찾으러 가야했었는데, 

그때 핸드폰 밧데리가 거의 없어서 지도를 못켜고 첨 가보는 길을 헤매게 되었었다.

어두운 동네 길을 내려가다가 어떤 자전거타는 여자애가 있어서, 몰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하냐고 했더니, 저쪽으로 가서 이렇게 저렇게 가면 된다고 알려줬었다. 

그리고나서 가르쳐준대로 5분정도 더 혼자 걷고 있었는데, 아까 그 여자애가 자전거를 타고 또 옆을 지나가면서, 나보고 잘 가고 있다고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그때 너무 고맙고 반가웠는데. (처음 뵙습니다만). 난 이 날 이 기억이 너무 좋다. 아직까지 정확하게 기억이 난다. 



내가 독일을 떠나기 며칠전이었다. 프릿츠가 살던 내 방. (이 시기에 프릿츠는 다른 지역에서 오래 있어야 했기 때문에 내가 이 친구의 방에서 지낼 수 있었다.) 이층침대가 있고 나무 가구로 내리는 햇살을 오래 기억하려고 찍었던 것 같다. 


밖으로 열고 닫는 하얀 창문이 좋았다. 창문을 열고 자도 벌레도 없고 소음도 없는 동네. 가끔 주말 아침에는 동네 아이들이 뛰어 노는 소리가 자그맣게 들리는 것도 좋았다. 

방안에 있으면 오래된 목조 건물이라, 같이 사는 다른 친구들이 계단을 오르내릴때마다 삐걱 삐걱하고 나무 소리도 들렸다. 이 집에 살던 시간들이 여유롭고 따뜻했기 때문에 그 때가 더 그리워지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또 언제 독일을 가게 될까? 꼭 한번은 다시 가고 싶은데. 

그때를 대비해서 못다한 독일어를 약간 해두는게 좋을까? 

아 독일어는 정말.. 베를린 장벽은 장벽도 아니다. 독일어가 진짜 장벽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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