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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정실 Jun 05. 2020

04. 살벌한 집구석

제2부. 스페인에서의 271일을 회상하다


그 녀석의

패인 목덜미 사이로

손가락이 쑤욱 들어갔다



새벽 2시가 넘었는데 누가 나의 방문을 열려고 한다.

덜컥 겁이 나 불을 켜보니 문이 덜컹거리고 있다.     

“누... 누.. 누구세요?”

가만히 들어보니 인기척이 아니라 무엇인가 문을 박박 긁고 있다.

셰퍼드다.

“엄마야!”

문을 열자마자 손을 짚을 새도 없이 바닥에 둔치로 내려앉았다. 한 마리는 문을 열자마자 방으로 뛰어 들어와 침대 위로 올라오고 두 마리는 어두컴컴한 마룻바닥에 뱃가죽을 댄 채 나를 의미심장하게 노려보고 있다. 덩치가 산만한 셰퍼드 세 마리가 새벽 2 시에 나의 2m 반경 아래 모두 놓여있다. 어찌나 놀랬던지 비명도 나오지 않는다.


갑자기 침대 위로 덤벼든 셰퍼드 한 마리와 사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나의 얼굴과 목덜미를 마구 핥아대는 그 녀석의 애정공세에 나는 양 귀를 뒤로 재껴 녀석을 간신히 제압했다. 목덜미를 바꿔 잡으려는 순간 물컹하니 살이 패인 곳으로 중지 손가락이 푹 들어갔다. 가만히 보니 녀석의 몸에 ‘옴’ 이 가득하다. 옴으로 곪아 터져 패인 상처에 손가락이 쑤욱 들어간 게다. 얼마나 씻기지를 않았는지, 얼마나 빗질을 해주지 않았는지 쭉정이 진 털은 예사요 살이 썩어 들어가 풍기는 악취가 방 전체에 진동한다. 집 안에서 안 키운다던 개들이 왜 내 방까지 잠입이 되었는지 나중에야 알았다. 개가 있으면 세입자를 받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주인집 아주머니가 거짓말을 한 것이란 걸. 하지만 이 또한 시작에 불과했다.


아나에겐 남편이 있다. 나이 차이가 많은 연하 동거남이라 했다. 가끔 집에 와 저녁을 먹고 자고 가는 그녀의 동거남이 오는 날엔 유독 시끄럽다. 그들은 아시아에서 온 바싹 마른 여자가 방 하나를 얻어 머물고 있다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TV의 볼륨을 한껏 틀어놓고 웃고 떠들었다. 밤 9시부터 시작되어 새벽녘에 끝나는 스페인의 늦은 저녁 문화와 수다스러운 민족의 특성을 알고 있었던 나는 그러려니 했다.

‘인심 써주지. 아시아인들은 예의 바르고 배려심이 깊으니까.’ 그들의 즐거운 저녁시간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그들을 향한 최대한의 배려였다.


잠을 청하려고 누우니 거실에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소리가 들린다. 워낙 소리가 커서 그들의 이야기가 귓가에 외국어가 아닌 듯 단어 마다마다 꽂혔다.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이렇게 1년 살다 보면 원어민 수준의 대화를 익히는데 어려움이 없겠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접시가 깨지는 소리가 나더니 그녀의 자해 소동이 시작되었다. 추측해 보건대 깬 접시의 일부를 들고 손목이라도 그으려고 하는 모양이다. 여자의 울부짖음과 남자의 과격한 호통 소리가 필름을 빨리 감은듯 한참 오가더니 갑자기 잠잠 해졌다. 문을 살짝 열어보니 그녀가 남자를 위협하고 있었다. 깨진 접시 조각이 아니라 날이 시퍼런 칼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경찰서에 연락해야 하나? 경찰서는 몇 번이지? 우리나라처럼 112인가? 아님 119? 911? 이럴 줄 알았으면 번호라도 알아두는 건데. 내가 나가면 위협 당할까?’

도무지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져서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남자가 그녀를 뒤에서 안아 칼을 던져 버렸다. 이어 그녀는 주저앉더니 흐느끼며 운다. 이 무시무시한 상황이 종료되기까지 두어 시간이 걸린 듯했다. 나는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자칫하면 금방이라도 살인 사건의 현장이 될 수 있었던 그 곳. 겁에 질려 떨리는 손으로 짐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툭 하니 떨어졌다. 계약서다.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은 계약서다. 하시라도 떠날 수 있도록 계약서를 가방 안쪽에 쑤셔 넣고는 짐을 싸 두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한동안 그녀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어학원에 일찍 나갔다.

며칠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나가 부른다.

“세시, 차 한잔 할래? 오늘따라 날씨가 화창하네.”

그녀는 가끔 들러 자신을 위로해주고 가는 동거남을 진정 사랑하고 있다고.

스페인에서 동거 중인 이들을 보며 놀랄 필요는 없다. 충격적인 일도 아닌 것이 내가 다니는 어학원 80%의 선생님들이 동거 중이다. 동거를 해도 혹시 아이가 생기면 부모로서 아이에 대한 책임을 다한다. 그들이 결혼을 하기보다 동거를 선택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고 했다. 그러니 그들의 문화일 뿐 색안경을 끼고 볼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가끔 그녀의 경우처럼 동거를 하는 사람이 다른 이성을 만나거나 오해가 생길 경우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 예사라고 한다. 요즘 일어났던 어마 무시한 일이 그녀에겐 일상이라니.

그녀는 말을 이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야. 그 때는 내가 잠시 흥분했을 뿐이지. 그는 나를 정말 사랑하거든.”

확실히 문화 차이란 표현이 맞다. 내가 그 사람들의 사랑방식까지 이해하기엔 버겁다. 스페인에 온 지 얼마 되었다고. 그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듯 하는 것과 무에 다를까.


이 살벌한 집으로부터 언제 탈출할 수 있을까. 그 후에도 늦은 밤 그녀의 흐느낌은 종종 이어졌고 거세게 비난하고 싸우며 경찰서에 연락 할 일들은 예사로운 일이 되어버렸다. 계약기간이 남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익숙해지는 일밖에 없었다. 거실에선 난동이 벌어지고 있고, 나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이어폰을 낀 채 전날 댄스 수업에서 배운 춤 연습을 하고 있는 코믹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그렇게 코믹한 광경이 일상이 되고도 손에 식은땀이 흘러 밤을 새우게 되는 일은 종종 벌어졌다. 지금도 알 수 없는 의문의 죽음을 그곳에서 보고 나서야 계약 기간을 포기한 채 집을 옮겼다. 그녀의 판정승, 아니 케이오승(KO)이다.


수업을 일찍 마치고 돌아온 화요일이다. 그녀는 자신의 지인이라며 머리가 하얀 백발의 여자 한 분을 모시고 왔다. 아나는 외출할 때마다 지인이 있다는 가장 안쪽에 있는 방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신신당부를 했다.

“절대 저 방문은 열지 마. 알았지 세시?”

며칠 후 주말 아침 그녀는 다급해진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안타깝게도 갑자기 집으로 모셨던 그 여자분이 숨을 거두었다고. 불과 하루 전만 해도 그녀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지인이라는 그분이 숨을 거두었다고? 얼마 되지 않아 검은 의상을 한 댓 명이 찾아들더니 그녀의 시신을 들고나갔다. 빼꼼히 열린 문틈 사이로 시체가 운구되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목격한 후 머리가 쭈뼛이 서고 소름이 돋아 양팔로 어깨를 감싸 안았다.      


곧 계약 기간이 끝나간다. 빨리 나가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아니 탈출이라는 표현이 더 낫겠다. 생각해보니 난 단 한 번도 이 집의 주방에서 식사를 해본 적이 없다. 부엌에서 저녁을 먹다 벌어진 동거남과 그녀의 살벌한 싸움을 목격한 이후로 트라우마가 남은 것도 있지만 하루고 이틀이고 설거지를 하지 않아 따뜻한 거실로 찾아든 날파리가 나보다 발 빠르게 부엌을 선점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마치 셜록홈스의 탐정소설을 경험하고 있는 듯했다. 이 집을 떠나는 데에는 다행히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스페인어만 완벽했다면 이 스릴러물의 정체를 알 수 있었을 텐데 아쉽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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