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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우지니 Nov 07. 2022

남편 새로고침(feat. 비폭력대화)

                              

나는 그와 오랜 연애 끝에 나의 확신으로 결혼했다. 하지만 결혼 후 남편의 말투에 대해 문제를 인식하게 되자 매 순간 그의 말 그릇에 상처를 받고 말 그릇 뒤에 숨겨진 마음을 본다는 것은 사치였다. 내가 남편의 말투에 대해 문제를 삼기 시작하자 다른 문제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연애 7년, 결혼 11년 차. 우리 부부는 아직도 마음을 함께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나의 선택(결혼)에 대한 자괴감으로 한참을 허우적대다가 벗어나기 시작한 건 아마도 나를 되돌아보면서부터이다. 8년 전 우연히 접했던 비폭력대화(NVC)를 다시 공부하며 꾸준한 연습모임에 참여하다 보니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 나의 언어습관이 이 사람을 더 자극했겠구나.', '이 사람은 인정과 존중을 필요로 했구나.' , '사랑이 더 많이 필요한 사람이구나...' 과거의 말다툼에서 받은 상처를 그대로 껴안고 내내 웅크려 지내던 내 마음속 어린 자아가 조금씩 밝은 곳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지난주, 지난 2년 간 코로나로 해외출장이 전무했던 남편이 3년 만에 독일 출장을 떠났다. 공항으로 출발하던 날 아침 비몽사몽 인사를 하고 보낸 후에 다시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칠판에 가득 담긴 남편의 세심함을 발견했다. 첫째 아이, <태양이가 할 일>이라는 제목으로 평소에 남편이 하던 일을 빼곡히 적어두었다.


'우유 챙기기(월, 수) , 가을이(물고기) 밥 주기(하루 한 번 조금), 다달이(달팽이) 오이나 상추 주기(3, 4일에 한 번), 사슴이(사슴벌레) 젤리 주기, 마지막으로 햇살이랑 잘 놀아주기.'


아침에 일어나 메시지를 본 아이는 여백 한편에 '아빠 사랑해요.'라고 썼다. 나는 카메라에 아이의 모습을 담으며 행복했다. 생각해보면 남편에게 감사한 일이 한 둘이 아닌데, 그동안 과거의 상처받은 나에 갇혀 제대로 감사함을 표현하지도 못하고 지냈구나 싶었다.









평소 남편은 빨래, 장보기를 도맡아서 한다. 남편의 출장 중 빨래는 당연히 내 몫이지만 남편이 독일에 있는 동안에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일이나 고기를 단골가게에 주문해서 보내주었다. 얼마 전 필리핀 출장 중에도 과일 냉장고가 빌 틈이 없도록 해 주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신나서 박스를 뜯는 아이의 얼굴을 담아 카톡에 보내주었다. "고마워. 당신 정말 대단해!" 표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남편은 귀여운 이모지로 답장을 했다. 연애할 때는 애교도 많고 재미있는 농담도 곧 잘하던 사람이었는데 결혼한 후 조금씩 줄더니 최근에는 그런 모습을 이 못 봤구나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그를 이렇게 만든 게 아닌가 자책하는 마음도 들었다.




나는 이제 남편을 바라보는 눈을 새로고침 하고 싶다. 과거의 일들로 색안경을 끼고 보느라 남편의 성실함과 책임감, 변함없는 사랑에 감사함을 찾지도, 표현하지도 못했다. 내가 선택했던 내 인생의 짝꿍이 예전처럼 더 많이 웃고 실없는 농담도 서슴없이 던지도록 해 주고 싶다. 이런 마음이 갑자기 드는 이유가 어쩌면 나의 육아휴직과 남편의 재택근무로 2년 내내 붙어있다가 오랜만에 떨어져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남편이 돌아오면 또다시 익숙한 생활패턴 속에 소통을 방해하는 서로의 언어습관으로 되돌아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오늘부로 내 남편을 바라보는 내 눈을 새로고침 한다. 인연이 시작된 지 19년 만에 나는 그와의 관계를 다시 시작하려 한다. 오랜 시간 동안 그를 바꾸려는 생각에서 그를 바라보는 나를 바꾸기 시작하니 훨씬 희망적인 용기가 난다.



어제, 메타버스 속 세상 IFLAND(이프랜드)에서 소통을 주제로 진행을 하는 친구가 초대 게스트로 나를 초대했다. '비폭력대화-나를 안아주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제목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오랜 육아휴직으로 왠지 모를 허 한마음을 위로받는 기회도 되었다. 비폭력대화에서는 기린 언어를 배운다. 기린은 육지동물 중에 심장이 가장 크기 때문에 가슴에서 연결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비폭력대화의 상징으로 쓰인다. 기린은 아카시아 잎에 붙은 뾰족한 가시들을 침으로 녹여서 먹는다. 상대의 말 그릇에 담긴 마음을 바라보는 연습. 내 삶의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느낀 이후에 기린은 내가 늘 생각하는 동물이 되었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자러 가려는데 카톡이 왔다. 남편이 주말 동안 아이들 선물을 샀다며 사진을 보냈다. 사진 중에는 기린 인형도 보였다. 내 선물로 기린 인형을 떠올려주다니!! 남편 '때문에' 비폭력대화 공부가 필요했는데, 이제 남편 '덕분에' 비폭력대화를 공부한다.


"고마워요, 내 소중한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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