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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우지니 Jun 20. 2024

오랑우탄과 조련사

어제 하교시간, 태양이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집에 들어왔다. 아침에 등교할 때만 해도 괜찮았던 거 같은데 불편해 보이는 무릎을 살펴보니 며칠 전 넘어져서 찰과상을 입은 부분에 진물이 보인다. 3, 4일 남편이 약도 열심히 발라주었던 곳이다. 딱지가 앉아 곧 새살이 돋겠거니 생각했는데 학교에 있는 동안 아이가 씻지 않은 손으로 긁고 딱지를 뜯었나 보다. 상처 주변도 벌겋다. 근처에 손을 대어보니 열감도 느껴진다. 어제도 좀 아프다고 하긴 했지만 친구들이랑 자전거 타고 놀 때 멀쩡해 보였다. 남편은 아이가 오버하는 것이라며 아이에게 핀잔을 주었다. 태양이는 억울한 표정으로 아빠는 나쁘다고 비난했다. 병원을 가봐야겠다는 내 말에 남편은 집에 있는 항생제을 먹이고 소독약을 바르면 금방 괜찮아질 거라고 오버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아이의 상처 부위가 더 나빠지기 전에 가는 게 좋을 거 같았지만 남편의 확신에 찬 말에 따르기로 했다. 어차피 병원에 가도 특별하게 치료방법이 없을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병원에 가면 상처 난 부분을 칼로 찢어서 치료한다는 아빠의 말에 아픈 무릎을 내어놓고 가고 싶은 병원대신 아빠의 치료방침을 따랐다. 9살 태양이는 항생제 한 알을 꿀꺽 삼켰고 물집이 잡힌 기포가 여러 군데 보이는 상처 부위에 빨간색 소독약을 발랐다.


그날 밤, 태양이 이마가 뜨거웠다. 나는 다친 무릎의 염증이 심해져서 열이 난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덜컥 겁이 나서 남편을 깨웠다. 남편은 그거 때문일 리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조금 놀란 눈치였다. 나는 어제 병원에 데려갔어야 했다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아이가 걱정되면서도 내심 병원에 가야 한다는 내 말을 무시했던 남편에게 죄책감을 심어주고 싶었다. 태양이가 잠이 든 상태인데도 상처 입은 무릎 근처에 손을 살짝 대니 화들짝 놀랐다. 무릎을 완전히 펴지 않고 내내 구부리고 자는 걸 보니 그 부위가 많이 아프고 불편한 게 분명했다.


오늘 아침, 아무래도 등교는 힘들어 보였다. 남편은 학교에 갔다 와서 병원에 가도 된다고 말했지만 이번엔 내가 질 수 없었다. 열이 나는데 학교를 어떻게 가냐고 한 마디 내지르고는 선생님께 병원 갔다가 학교를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다행히 남편은 별말 없이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 내가 햇살이를 챙기는 동안 남편은 병원 예약도 하고 외출준비를 마쳤다. 제대로 걷지를 못하는 건지, 그런 척하는 건지 조금 헷갈리긴 했지만 태양이는 두 손을 바닥에 대고 기다시피 해서 복도를 지나갔다. 그 와중에 남편은 아이의 텀블러에 얼음을 넣은 보리차 물을 챙겨서 학교 가방을 손에 들었다. 태양이가 물었다. "왜? 나 오늘 학교 가야 돼? 아픈데?" 남편은 아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리쳤다. "그 정도 가지고 학교를 안 가면 되겠어? 병원 갔다가 아빠가 데려다줄게." 아이는 지지 않고 말했다. "나 지금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상태야. 움직이는 것도 힘들다고. 열도 나는데 학교를 어떻게 가~~!"


대화인지 싸움인지 알 수 없는 말이 오가는 가운데 나는 햇살이의 아침을 챙기고 있었다. 오늘 하루 아이가 쉬는 게 좋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더 큰 소리가 오갈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태양이는 현관에 서서 학교 가방을 든 아빠를 보고 울기 시작했다. "오늘은 안 가면 안 돼? 병원만 갔다 올래." 남편은 말했다. "일단 가보자고, 어서 신발이나 신어!" 태양이의 울음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나는 햇살이의 머리를 땋으며 소리를 높여 말했다. "지금 열도 있으니까 어차피 이 상태로는 등교가 안 돼. 일단 병원 갔다가 집에 와요. 내가 상황보고 가도 되겠다 싶으면 내가 데려다줄게." 나는 행여나 남편이 화를 낼까 봐 긴장되었지만 다행히 아이의 책가방을 내려놓았다. "아 빨리 신발 신으라니까, 제대로 걸어. 왜 기고 있어! 오버하지 마." 남편은 아이한테 소리를 질렀다. 아빠가 뭐라 하든 태양이는 고집스럽게 결국 두 손과 두 발로 현관까지 갔다. 오랑우탄 한 마리와 말 안 듣는 오랑우탄을 통제하려는 조련사 한 명이 현관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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