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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섬 Jun 07. 2023

회사를 그만둬야 하나 처음으로 고민했다

2022년 5월, 잠시 쉼표를  찍었던 회사에 출산휴가, 육아휴직을 마치고 나는 복직했고, 지금까지 잘 다니고 있다. '잘' 다니고 있다 라는 말은 '잘' 지내 와 같은 선상에 있는 것 같다. 중간중간 살면서 이벤트는 많지만 그걸 구구절절 설명하기도 귀찮고 전체적으로 문제는 없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니까.


나는 복직을 무척이나 망설였다.

회사를 관두라는 가족들의 이야기는 핑계고, 팀이 예전과는 많이 바뀌어서 내가 모르는 새로운 업무를 하며 겪을 두려움, 복직해도 도우미 비용이나, 점심값, 품위유지비 등으로 급여만큼 돈이 나갈 것이라는 예상, 아이의 성장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싶었던 욕심, 그리고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잠시 느끼는 혼자만의 자유를 만끽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그런 나에게, 남편은 회사를 다녀보고 결정하라는 이야기를 했다.

코로나 시대에 임신을 겪으며 걱정인형에서 걱정마왕으로 초진화하여 '나 그만둘래'를 입에 달고 다니던 나에게

그때에도 '지금 관두면 후회할지도 몰라', '자기 회사 복지 좋으니까 그것만 받고 나와' 하던 남편이었다. 그리고 나는 출산휴가, 육아휴직을 보내며 매달 급여통장에 찍히는 숫자를 보며 오빠 말 안 들었으면 어쩔 뻔했나, 응원해 준 우리 신랑 최고다 입에 달고 살았다.


우리 회사는 아기엄마들이 꽤 많은 여초회사에 속해서, 복직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복직해서도 '아기엄마 다 됐네' 소리는 듣기 싫어서 다이어트를 급하게 했고, 옷도 평소보다 2배는 더 사 입었다. 그래서 새로 만난 동료들로부터 내 기준 최대 칭찬이었던 '아기 엄마 안 같아요.'부터, '저랑 동갑인 줄 알았어요'라는 신입사원의 입에 발린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역시 워킹맘에게 찾아온다는 위기가 결국 나에게도 찾아왔다.

복직한 지 5개월쯤 되었을 때, 아기의 감기가 잘 떨어지지 않았는데, 그게 문제의 시발점이 됐었다. 평소 다니던 이비인후과, 소아과에서 별 이야기를 안 해서 언제 감기가 떨어지지, 그래도 열은 안 나서 다행이네, 하며 회사에 출근했는데, 기침소리가 예사롭지 않다는 어린이집에서의 연락을 받았다. 회사에 바쁜 일이 있어 휴가를 사용하기 애매했지만 서둘러 반차를 사용하고 아이를 하원시킨 후 이비인후과에 갔다. 소아과에 가라고 소견서를 써주시기에 기존에 가던 곳보다 더 유명한 소아과를 찾아갔는데 아기가 모세기관지염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말이 모세기관지염이지 검색해 보니 폐렴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아기는 폐렴 초기에 속했던 상태였고, 입원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당분간 어린이집은 못 갈 것 같았고 가정보육이 필요했다.


제일 먼저 친정 엄마에게 연락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엄마는 사실 이미 조카를 봐주고 있던 상태였고, 기댈 순 없다고 생각은 했지만 역시 제일 처음 생각난 건 엄마였다. 우리 시댁 어머님과 아버님은 연세가 엄마아빠보다 10살이 더 많으신 데다가, 이전에 아기가 아플 때 두어 번 부탁을 드렸었는데 집에 가시자마자 3일을 편찮으셨다는 소리를 듣고, 도저히 어머님에게 부탁할 용기가 안 났다.


두 번째로는 코로나로 집에서 자가격리 중이던 아빠에게 연락했지만, 아빠는 당연히 코로나 이슈도 있고, 엄마도 요즘 체력이 말 같지 않다고 하시며 내 아이를 봐주기는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각오를 했어도 이런 폭력은 많이 아프다고(비유하긴 좀 그렇지만), 나는 순간 실망감으로 머리가 멍해졌다. 그리고 눈물이 났다.


제일 처음 든 생각은, 내가 이렇게 돈을 벌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내 자아실현을 하겠다고, 나를 사랑하겠다고 하는 행동들이 우리 가족을, 내 아이를 힘들게 하는구나. 내가 집에 있었다면, 어린이집을 덜 다녔다면 덜 아프지 않았을까? 였다. 두 번째로 든 생각은 이기적인 생각들로, 조카를 봐주겠다고 말한 엄마가 미웠고, 조카를 맡긴 오빠와 새언니가 원망스러웠고, 아픈 시기가 비슷한 조카를 향해서도 괜스레 나쁜 마음과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생각을 하는 와중에 다시 엄마에게 전화가 왔고, 엄마는 조카를 등원시키고 우리 집에 와서 내 아이를 봐주시겠다고 말했다. 친정집과 우리 집은 차로 왕복 최대 1시간 30분 정도 거리로, 엄마는 경기도와 서울을 오가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말씀도 너무 감사한데도, 나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머릿속이 꽁꽁 차버렸기에 속을 알지 못하고 듣기만 했던 남들의 사정과 나를 비교하며 엄마를 비롯한 가족들을 향해 모진 말을 쏟아냈다. 그러나 엄마는 너무나 T인 사람이고 나는 너무나 F인 사람이라, 엄마는 나에게 상처되는 말(팩트폭행)을 하고, 나는 (엄마의 표현에 의하면) 엄마의 속을 살살 긁었다. 그렇지만 마지막 카운터 한방이 강했다.


 'S(내 아이)가 아플 때, 엄마가 안 간 적 있어?'


그렇다. 엄마는 항상 내 아이가 아플 때 우리 집에 왔었다. 심지어 혓바늘이 나고, 전날 열이 나고 몸이 아플 때에도 왔었다. 그렇지만 나는 엄마보다는 내 아이를 더 생각하고, 내 아이의 안위만 먼저 묻곤 했다. 나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과 목멘 목소리로 '아니'하곤 엄마의 노고를 인정했다. 그렇게 1시간에 걸친 엄마에게의 투정은 끝이 났다.


친정엄마와 어머님의 도움으로 아이는 일주일간의 가정보육을 편히 할 수 있었고, 모세기관지염은 완쾌되어 어린이집에 즐겁게 등원했고, 키즈노트를 통해 본 아이는 친구들, 선생님들과 재밌게 놀며 평소처럼 웃고 있었다. 회사는 다행히도 아이와 나를 걱정해 주고 편의를 적극적으로 봐줬고, 덕분에 마음을 편하게 먹고 일할 수 있었다.


버릇처럼 달던 '회사 그만둬야지'가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됨과 동시에

나에게 아이와 엄마들, 회사는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었던 워킹맘의 첫 번째 위기였다.


코끼리 코뻥을 피리처럼 불고있는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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