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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순하루 Jul 21. 2023

아는 사람의 일, 하고 말고의 기준



퇴근길의 늦은 저녁 하늘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재미있기도 하지만, 프로젝트에 따라서 스트레스의 강도도 정해지는 듯하다. 어떤 클라이언트를 만나느냐에 따라서도 업무강도는 정해지니까. 유연한 클라이언트 vs 까다로운 클라이언트 뭐 다양한 클라이언트를 만난다는 것은 때에 따라서 고마운 일이기도 하지만, 다시는 오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인 경우는 마음 잡고 일하기는 여간 어렵지 않다. 그리고 늘 후회한다. 하지 말았어야 했거늘.


그리고 나의 경우, 아는 사람의 일이 제일 난감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 이야기이다.


"OO야. 이거 스티커를 만들어야 하는데 시안 좀 잡아 줄 수 있어? "


-어떻게 하면 되는데?


"그냥 원형 스티커야. 간단해. 로고 들어가고 전화번호 들어가고, 좀 급해서 그러는데 해 줄 수 있어?"


어떻게 하면 되는데?라는 말부터가 잘못됐다. 상품의 가치는 스스로가 매기는 것이거늘, 나의 디자인 상품을 나 스스로가 낮게 평가하기 시작하면서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는데?라고 대화를 이끌어 갔던 것이다.


우리가 어떤 제품을 사려면, 사업을 운영하고 있지 않은 한, 선결제 후 배송이라는 시스템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사업을 하시는 분들이라면, 여신이라는 것이 있기에 익월 10일 결제 및 익월 말 결제등 결제 방식을 해당 업체와 정하고 거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대 개인의 거래는 의뢰하기 전에 선결제라는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소비자 입장에서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들 수도 있는데 결제하고 나중에 맘에 안 들면 취소는 어떻게 하느냐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그래서 소비자는 시장조사를 철저히 해야 하고 경험이 많은 디자이너를 선택하면 된다. 특히 환불규정도 잘 따져보고 말이다. 어찌 되었든, 원하는 디자인으로 도출이 되지 않으면 분쟁의 소지는 있기 때문이다.


다시 스티커 이야기로 돌아가면, 나는 그렇게 로고도 받고 전화번호도 받고 5cm짜리 스티커를 정말 열심히 만들어서 시안을 보낸다. 그럼 한 번에 선택되는 일이 없다. 로고를 좀 위로 아래로, 전화번호를 원형에 맞게 돌릴 수 있어? 여러 가지로 색을 바꿔볼 수 있어? 스티커 배경색을 좀 바꿀 수 있어?


장난하냐?!! 지금 나 훈련하는 거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 올랐지만, 나는 그냥 했다. 왜!!! 단 돈 몇 만 원이 아쉬웠으니까. 스티커 제작비에 수고비를 조금 더 준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얼마 걸리지도 않으니까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했다. 그러면서 나는 자기 위안을 했다. 그래 포트폴리오가 될 거니까. 스티커 종류가 많아지는 거니까. 경험이니까.


결국 수차례의 수정 끝에 최종시안은 넘기고 제작은 되었고, 발송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선결제가 되지 않아 내가 먼저 결제하고 후불로 받고 그러면서 배송비는 그것대로 나가고 결국, 내가 남은 건 1만 원 안팎의 수고비였다. 통장에 남은 금액을 보고 있자니, 서러워졌다.


나는 왜 일을 이렇게 할까?

나는 왜 경험해 봐 라는 말에 이렇게 약해지는 걸까?

나는 왜 다 해주고 이렇게 불만이 가득한 걸까?


답은 한참 후에 찾았다.


"이제는 본업인 직장에서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서 추가적인 업무는 할 수가 없어. 데이터 줄 테니 다른 디자이너에게 부탁해 봐. 요즈음 인터넷에 저렴하게 잘 제작해 주는 곳이 많아."


거절의 멘트를 날리고 나니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가 하지 않아도 되니 부담 없어 좋은 것도 있지만, 다른 데서 해봐라 나처럼 해주는 데 있나 뭐 이런 마음도 있었고, 진짜 중요한 건 내가 나 스스로를 보호했다는 사실이다. 일을 하면서 왜라는 질문이 떠나지 않고 나는 이상하리 만치 손해를 보고 있다면, 그건 일하는 방식이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그 일을 하지 않았다. 이 외에도 너무도 웃기게 차후 연락이 와서는 그 디자이너가 이런 견적을 내었는데 이 금액이 맞는지 다시 물었다. 정직하고 정확하게 계산해 주었다. 상대측 디자이너가 조금 많이 받는 것을 확인했다. 결론은 그 견적에 맞게 결국 그 디자이너를 선택했다. 이유는 디자인이 맘에 들어서이며 인쇄감리진행상황까지 체크되니, 안 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디자인은 무형의 가치이며 그 가치를 사는 사람인 소비자가 디자인 설득이 되면 구매하면 되는 것이다. 설득되었고 금액은 정당하게 지불된 것으로 확인했다. 그때 나는 알게 되었다.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는구나. 아는 사람의 일은 선결제 시스템이 아니면 하지 말아야겠구나. 그리고 내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해 주는 것이 맞지라고 생각했지만 그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아는 사람의 일은 다시는 하지 않는 것이 맞는구나.


지난 일들을 생각하면 후회가 많이 되고, 속상한 일들이 많아 다시 기억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돌아보니, 아는 사람의 일은 더욱이 부탁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와 거절하기 힘든 상황으로 진행되었다. 그 안에서 뭉그러진 나 자신은 그 누구도 돌보지 않았다. 결국 내가 날 알아본 것은 한 참 후의 일이 되었고.


아는 사람의 일이라고 해서 다 이런 건 아니지만, 나의 이 쓴 경험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거절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일이었다. 거절의 용기는 나 스스로도 편하게 하지만 상대에게도 정확하게 나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예의였던 것이다.


아는 사람의 일, 하고 안하고의 기준은 나이다. 주도권은 내가 갖는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고, 재미있을 거 같은 일이고, 정당한 대가를 받고 하는 일은 해도 된다. 하지만, 어그로 부탁하고 경험이 될 거야라고 회유하면서 아는 사람이니까 싸게 해달라고 하는 일은 안 하는 게 맞다. 싼 게 비지떡이기 때문이다. 디자인이나 내가 사는 물건이나 가치는 금액세팅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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