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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호 Mar 21. 2024

<서양철학사 하권>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 (하) 근세와 현대 >,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저/강성위 역  이문출판사  

  890쪽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책을 2주간에 걸쳐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읽고 나서 나의 사고를 반성할 수 있었다. 이 책의 저자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로부터 현대 철학까지 이어지는 거대하고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계열을 지지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흄을 필두로 한 영국 경험론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다. 이 때문에 책 내에서 일부 서술들은 편향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먼저 밝혀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은 그는 적어도 철학자의 철학 자체를 설명하는 데는 최대한 담백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철학의 내용을 제시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단지 그 철학이 가지고 있는 내적, 외적 모순과 철학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저자의 생각이 드러나기는 한다. 즉 전반적으로는 철학사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유서 깊고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지지하는 계열에서 바라보는 철학에 대한 서술이 현대 사회에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근세 영국 경험론의 영향을 매우 크게 받고 있다. 빠른 산업화와 자연과학의 급격한 발전과 함께 자연주의와 유물론이 대두되었다. 현대철학에서 주요 분파 중 하나인 분석철학은 이러한 경험론과 뗄 수가 없는 관계이며, 사람들의 철학에 대한 관심도 비합리주의 계열에 쏠려 있다. 그리고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낡고, 뜬구름 잡는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대에서 조금이나마 세상을 중립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형이상학 입장에서도 바라봐야 할 것이다. 나 역시 책을 읽으며 내가 얼마나 유물론적, 자연주의적 사상에 속해 있는지 알게 되었다. 이미 표상만을 통해서 사고하는 것은 나에게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다. 예를 들면, 나는 과거 사회학에 관심이 있었을 때, 사회적인 문제들을 모두 경제적인 문제로 환원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하였으며, 각종 문제를 수학적으로 환원하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경험론 파트의 철학자들을 읽고 이해하는 데 드는 시간보다 합리론 파트의 철학자들을 읽고 이해하는 시간이 최소한 2배 이상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경험론의 체계를 살펴보면, 그 내적인 모순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힐쉬베르거는 셀 수도 없이 그 모순들을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으나 책 615쪽과 616쪽에 나오는 간단한 논리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흄의 경험론은 표상만을 알고 있다. 즉 선천적인 필연성은 없어져 버리고, 개연성만 있게 된다. 하지만 경험론자인 흄은 결정론자이다. 그 이유는 그는 스피노자에게 발생하였던 인과의 사슬이 너무나 통속적이어서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신념에 지나지 않는 인과의 사슬은 버려졌어야 하나, 그는 끝까지 결정론을 고수하고 있으며, 현재 흄은 경험론자들 중 가장 체계가 발달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힐쉬베르거는 유물론과 자연주의 철학자들의 모순을 지적함으로써 해당 사고가 가진 비합리성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단순히 인과의 사슬을 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으나, 만약 인과의 사슬을 버리게 된다면 이 세상 전체는 전부 표상과 개연성의 원리로만 구성될 것이고 결국 허무주의로 귀결된다는 간단한 결론이 나타난다. 

  이 경험론은 인간의 신앙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 종교인들은 영국 경험론의 급성장으로 인해 중세까지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근본적 사상을 버리고 영국 경험론과 타협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왜곡된 신앙의 예시로 키에르케고르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이론보다 실천을 중요시하며, 개인적인 신앙을 중요시했고, 당대 퍼져 있었던 “그가 보았을 때의” 세속적인 교회를 적대시했다. 그는 신앙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자신이 그 비합리적인 신앙을 받아들임으로써 ‘나’에게로 진정으로 내면화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런 사상은 충족이유율을 전혀 만족하고 있지 않다. 그는 신앙이 비합리적이라는 것에 대한 이유를 들지 않는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로는 당대에 독일 관념론이 몰락하고, 유물론이 득세했던 탓일 것이지만, 일반 대중이 아닌 철학자로서 신앙에 대한 비합리성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넘어가는 모습은 비합리적이다. 그리고 그 비합리적인 신앙을 받아들이면 ‘나’에게로 내면화된다는 주장의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설령 이 내용이 참이라고 해도 그에게 묻고 싶다. 자신이 ‘비합리적’이라고 주장한 신앙에 굴복하는 자신이 그 신앙으로 말미암아 참으로 내면화가 가능한 것인가? 합리적인 인간이 어째서 비합리적인 체계에 굴복하고, 그럼으로써 합리적인 인간 자신을 극복한다는 말인가? 비합리적인 것이 합리적인 것보다 더 우월하다는 기괴한 논리를 가지고서만 이를 이해할 수 있다.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에 이유가 붙지 않는 순간 그것은 개인의 신념이요, 도그마로밖에 되지 않는다. 키에르케고르가 가지고 있었던 가장 큰 문제점은 자신이 다루고 있던 철학적 문제를 너무 거칠고, 서투르게 다뤘다는 것이다. 그는 왜 이런 사상을 주장했는가? 나는 이 문제의 원인이 영국 경험론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이미 영국 경험론은 당대 사람들에게 너무나 익숙해져 버렸을 것이고, 참인 사상으로까지 생각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키에르케고르는 그 와중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싶었고,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방법은 “신앙은 비합리적이나, 그래도 나는 이걸 믿음으로써 내면화를 이룩한다”라는 사상을 내세운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는 ‘합리’와 ‘신앙’ 모두 다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그 사상은 궤변으로 끝나게 된다. 문제는 현대인들에게도 키에르케고르와 같은 사상이 신앙에 큰 악영향을 줄 소지가 너무나도 크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과거처럼 경험론이 지배적인 시대이며, 그 와중에서도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버리고 싶지 않은 자들은 키에르케고르를 발견하게 되고, 그처럼 생각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그의 사상은 힐쉬베르거가 흄의 사상에 대해 표현한 것처럼 신앙인의 삶을 감염시키기 쉽다. 나는 그의 철학을 깊이 생각하며, 인간의 이성이 아무런 논리적 기반 없이 자의적으로 판단한 내용들이 우리에게 큰 악영향을 줄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이외에도 키에르케고르와 유사한 사상의 부류는 더 있다. 신앙이 비합리적이라고 단죄하지는 않으나, 오로지 믿음만을 강조하는 사상이다. 믿음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눈여겨봐야 할 점은, 그들이 믿음만을 강조함으로써 신앙의 내용 자체를 이성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회피하고, 신앙의 내용 자체가 비합리적일 것이라는 내용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니체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깊었다. 힐쉬베르거가 가장 적대시하는 철학자는 흄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경험론을 표면적으로 체계화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가장 멸시하는 철학자는 니체일 것이다. 그는 니체를 설명하면서 니체의 정신병에 걸렸을 것이라고 하며, 그의 핵심적인 사상은 정신적인 질환을 통해서 나타났을 것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힐쉬베르거는 그가 가치들을 제대로 뒤엎지도 못했고, 자신이 새로운 가치표를 제공하려 했으나 그 가치표를 제대로 제공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나도 니체의 사상을 검토하면서 그의 철학을 반박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반박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철학은 온통 모순덩어리이고, 비판적이고 냉철하게 접근하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철학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야스퍼스는 니체를 실존주의적으로 해석하면서도 일반적 비판은 니체의 철학에서 수많은 모순들을 찾아낼 수 있다고 인정하였다. 하지만 그는 현대사회에서 위대한 철학자 중 한 명으로 불린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부분적으로 해석하고, 니체의 틀 안에 제각기 자신의 이상을 끼워넣었다는 가치를 끼워 넣었다는 힐쉬베르거의 설명이 이 현상을 가장 잘 해명할 것이다. 물론 나는 그에게 정신병자라는 인신공격에 가까운 명칭을 붙이고 싶지는 않으나, 그의 철학이 과연 현재의 위상을 가지고 있을 만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칸트의 윤리학에 대한 날카로운 반박도 숙고해 볼 만한 것이었다. 윤리형이상학 정초와 실천이성비판은 내가 성경 다음으로 추천하는 책이다. 그리고 힐쉬베르거의 철학사를 읽고 나서도 여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칸트는 경향성을 배제하고 오로지 선천적인 이성만으로 인간이 왜 존엄한지, 왜 자유로운지, 그리고 그 인간이 따라야만 하는 윤리는 무엇인지 설명한다. 그리고 그 윤리는 의무론의 방식으로 나타나며, 주관적인 가치가 끼어들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신 증명과 사후세계는 왜 존재할 수밖에 없는지까지 설명한다. 나는 칸트의 윤리학을 만나고, 진정으로 철학을 사랑하기 시작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칸트의 윤리학에도 약점은 있었다. 그는 과도하게 형식주의적으로 윤리를 추구하였고, 실질적인 윤리의 내용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힐쉬베르거는 460쪽에서 다음과 같이 칸트의 윤리학을 비판한다. 현대의 실질적 가치윤리학은 칸트가 도덕적인 것을 형식주의적으로 이해된 의무로만 다룬다면 너무 도덕적인 것을 좁게 보았다는 것이다. 이웃사랑이 이웃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의무만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 행위는 아무런 뜻도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라는 것이다. 물론 칸트의 입장에서는 이웃 사람의 행복이 아니라 의무를 따르는 것이 더 올바르다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이웃사랑의 목적을 보았을 때, 그것이 나의 의무만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의아하다고 생각할 만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헤겔을 소개하고 싶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헤겔의 철학을 깊이 있게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칸트의 관념론에는 아포리아가 있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피히테와 셸링이 나섰지만, 여전히 내게는 만족스럽지 않았고, 특히 피히테의 철학은 2번을 반복해서 보았는데도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명확하지 않았다. 반면 헤겔의 절대적 관념론은 논리적으로 깔끔하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그는 절대적인 세계정신과 변증법을 통해서 철학을 전개해 나간다. 그 철학에는 고대, 중세 철학의 정신이 엿보이고, 칸트의 아포리아에 대한 해명까지 너무나 완벽하게 끝나며, 마침내 독일 관념론을 완성하는 그의 논리 체계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진리는 전체다",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다"라는 이 말은 헤겔을 이해할 때 그 진가를 드러내게 된다. 물론 그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그가 범신론이라는 생각은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헤겔이 범신론인지, 어떤 의미에서의 범신론인지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고 한다. 헤겔의 철학 체계는 너무나 방대하여 글에 다 담을 수는 없지만, 혹시 나와 같이 칸트에 매료되었던 사람이라면 헤겔의 사상을 공부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철학사를 읽는 것은 나의 사고가 과연 어디에 속해 있는지, 그리고 나의 사고에 모순은 없는지, 조금 더 합리적인 사고 방법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 상, 하권은 그러한 반성을 하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독서 난이도도 높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책들과 형이상학에 비교하자면 훨씬 읽기 쉬울 것이다. 물론 처음 철학을 공부한다면 이 책을 당장 추천하기에는 어렵겠지만, 어느 정도 고대 철학을 공부하고, 형이상학적 사고에 익숙해졌다면, 꼭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를 통해서 깊이 있는 사고 반성과 통찰을 얻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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