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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비서가 Aug 13. 2021

제3화 걷다가, 가끔은 춤을 추기도 했을까?

루쉰의 [길손]('들풀'에 수록)은 걷다가, 가끔은 춤을 추기도 했을까? 내 앞의 놓인 生의 길 위를 춤을 추듯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춤을 출 줄 아는 신만을 믿는다는 니체의 말은 무슨 뜻일까? 오랫동안 생각했다. 이진우 포항공대 석좌교수의 해석처럼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자’만이 중력을 이기고 몸을 떠올려 춤출 수 있다는 것인가? 


나의 욕망과 실존하는 삶의 조건들이 서로 맞지 않고 삐걱대었던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나의 생각과 몸이 각각 다른 것을 말하고 다른 것을 행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름도 모른 체, 매번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기억을 할 수 있을 때부터 혼자서 먼 길을 걸어온 길손처럼. 걷기를 멈춘 적은 한 번도 없다. 나는 단연코 쉬지 않고 계속 길 위에 서 있었다.


지금 현재의 시간에서 옛일을 다시 들추어내어 기억한다는 것은 아침이슬을 함초롬히 머금은 향기로운 꽃을 꺾는 것이 아니라, 색깔도 향기도 바랜 꽂을 저녁에 줍는 것이다. 적어도 생생한 꽃잎이 가진 현란한 色光과 잔향에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을 수는 있다.


사관학교는 그냥 '그런 곳’이었다. 겨울밤 새하얀 눈이 바람에 날리는 12월에 그곳을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여느 대학의 눈 쌓인 캠퍼스 같은 낭만적인 기운이 언뜻 보이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안에는 자신을 낳아준 부모님이 살고 있는 집으로 갈 자유조차도 가지지 못한 ‘사관생도’들이 횡과 열을 맞추어 무리 지어 다니고 있었다. 


국방색 교복을 입고 귀밑 십 센티도 안 되게 짧게 자른 단발머리가 고등학생인지 대학생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생도들의 표정에서는 공통적인 무언가를 볼 수 있었는데, 그건 스스로 집을 박차고 나온 성년의 여자들만이 가진 자부심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작은 움직임에서도 흘러나왔다. 모든 사소한 감정들과 관계들을 끊어내듯 몸짓은 절도 어렸다.



내가 간호사관학교에 들어간 이유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 같은 거시적인 사명감 때문이 아니었다. 알다시피 대한민국 여자에게는 병역의 의무가 없다. 나는 여성으로서의 병역의 의무까지 이행하는 대신, 전형적인 가족주의적인 삶으로부터 벗어나길 원했다. 


간호장교는 전시에 간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양성하는 인력이니 만큼 학기 중에는 간호학과 기본적인 군사훈련을 하고, 방학 때는 유격훈련을 하였다. 훈련을 시작하기 전에는 반드시 위장(僞裝)을 하였다. 검은 위장크림을 얼굴에 바르고 철모에는 나뭇잎 같은 풀 무더기를 꽂아 잠복할 때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위장을 마치고 소총을 둘러멘 소녀들의 모습은 사뭇 결연해 보였다.


나는 푸른빛 풀무더기 대신 만개한 분홍빛 코스모스를 철모에 꽂아 위장을 마쳤다. 그때가 가을이 한껏 깊어진 처서, 늦은 오후였기 때문이다. 단풍이 온 산을 휘둘렀고, 저녁노을이 서쪽 하늘에서부터 번져와 천지가 온통 불이 붙은 듯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두껍게 위장크림을 바른 19살 남짓한 소녀들의 검은 얼굴에서 조차 붉은빛이 너울거리며 비쳐 나올 정도였다.


코스모스를 꽂아 위장(僞裝)한 나는 감점을 받았다. 조교의 어이없어하는 표정과 동료 생도들의 한심해하는 반응은 덤이었다. 그 덕에 학점은 깔았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노을 지는 처서 저녁에 코스모스만큼 자연스러운 자연물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 봤자, 이런 것은 사관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규정에 철저히 굴복한 나의 소극적 일탈일 뿐이었다.


생도들은 단체생활을 하였다. 학교 당국에서는 6개월(매 학기) 마다 전 학년을 4개의 건물에 나누어 합숙하게 하였다. 그리고 1번부터 4번까지 번호를 앞에 붙여 중대라고 불렀다.  친해질 만하면 헤쳐지고 또다시 새로운 중대로 묶이는 것이 4년 내내 8번이나 반복되었다. 사람과 장소에 익숙해지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욕구를 끊어내기 위한 훈련이라는 짐작이 드는 대목이다. 임관 후에는 그 기간이 조금 길어져 2년마다 전국을 옮겨 다니게 된다.   


같은 중대의 생도들은 이른바 연대책임이라는 것을 같이 졌다. 생도들은 일주일에 한 번의 평일 외출과 주말 외박을 할 수 있었다. 그때 외에는 교문을 벗어날 수 없도록 규율이 정해져 있었다. 외출이나 외박 후, 정해진 복귀 시간을 1초라도 넘겨 ‘미귀(未歸)’를 하게 되면 그 중대에 속한 전 생도의 외출과 외박이 제한되었다. 그야말로 미귀(未歸)의 죄(?)를 지은 생도는 만인의 죄인이 되어 그 기간 동안은 고개도 들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그래도 미귀(未歸) 횟수는 줄지 않았다.   

     

 6월이 되면 전 사관학교의 축제가 벌어졌다. 육군사관학교, 공군사관학교, 해군사관학교, 그리고 내가 다녔던 간호사관학교에서도 축제가 열렸다. ‘백합제’라고 불렀다. 간호사관학교를 제외하고 육사, 공사, 해사의 축제에는 생도들의 여자 친구를 초대하여 ‘가든파티’라는 것도 열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우리 학교는 축제기간 조차도 禁男 규정을 철저하게 지켰다. 아버지나 교문 안으로 겨우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남자도 없는 여자들만의 축제의 마지막은 항상 광란의 댄스타임으로 마무리되었다. 우리도 그날만은 중력의 무게를 벗어던지고 마음껏 하늘 높이 발을 차올리며 춤을 추었다. 남자는 아니었지만, 사랑하는 전우이자 친구와 손을 맞잡고 마음껏 춤을 추었다.


나도 물론 거기에 있었다. 매년 그 댄스타임에서 나는 신발 한 짝씩을 잃어버렸다. 매년 6월의 절기 大暑에 시작되는 백합제의 마지막 날만이 ‘온전한 나의 시간’이었다. 딱 하루 내가 ‘나의 욕망’과 ‘생활’이, ‘생각’과 ‘몸’이 일치되는 유일한 날이었다. 일탈이라는 행위로만 나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일상적인 삶에 포함되지 않는, 그날은 정말 특별한 날이었다.



그 후로는 그렇게 춤을 출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한 짝씩만 남은 네 켤레의 신발처럼 내 삶은 항상 균형감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가졌다. 욕망과 현실, 생각과 몸의 사이뿐 아니라, 일과 가정의 균형은 고사하고 된장찌개조차도 짠맛과 매운맛의 균형을 잡지 못했다.


일상에서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으로 나는 지속적인 초조감을 느끼고 있다. 그때 일 년 중 가장 더운 대서의 밤에 열렸던 백합제에서는 한 발을 공중에 쳐올리고서도 넘어지지 않고 춤을 추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양발을 지상에 붙이고도 휘청거리고 있다는 불안감을 통제할 수 없다니. 


그때 춤을 추며 느꼈던 내 양 발바닥과 영혼의 절묘한 균형감각은 왜 지금은 상실되고 없는가? 스스로에 대해 진정한 관심도 사랑도 않게 된 무심함이 원인일까?  새롭고 낯선 길을 시도하기보다 익숙함으로만 향하는 게으른 관성 때문일까? 그리하여 나는 바흐의 그것이 무엇이든지 무의식이던지, 사유이던지, 번뇌조차도 끊임없이 쌓아 올리는 푸가 선율을 들으며 쉬지 않고 生의 균형점을 찾는 글쓰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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