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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 Feb 10. 2023

집과 초콜렛

한 집에서 2년을 곧이 살아본 적 없다. 다만 5년을 내리 산 집이 있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때 아빠가(엄마 땅에 엄마 돈으로) 지은 교외의 전원주택. 평일 내내 학교와 야자실, 학원을 왕복하다가 금요일 저녁엔 학교 앞 정류장에서 대치동 가는 파란 버스 대신 양재동을 지나는 빨간 버스를 탔다. 언니와 심하게 싸우고 나면 평일에도 탔다. 우리 학교 학생 중 그 빨간 버스를 타는 사람은 나 뿐이었다. 누구는 빨간 버스를 타고 주말마다 대치동에 왔다지만.


버스에서 내려 언덕을 10분 남짓 걸어 오른다. 우리 집은 전원주택 단지의 제일 위, 동네 산의 입구에 있었다. 가는 길엔 미국의 도시처럼 반듯한 직사각형 블럭에 모두 다른 사람이 사는 모두 너무 다른 주택이 서너채씩 마주 서있었다. 항상 같은 길로 가지는 않았다. 집집마다 다른 나무가 있고 다른 꽃이 피었다. 계절마다 나무의 모습이 다르고 다른 꽃이 피었다. 직사각형 블럭을 따라 난 새 아스팔트 길 말고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거기선 사람을 마주치는 일이 별로 없었지만, 누굴 본다면 유심히 봤다. 어느 집의 주인인지 매번 궁금했다.


단지 입구에서 6개의 블럭을 지나 왼쪽 골목, 블럭을 두개 더 지나 전체가 희고 각진 유럽식 2층 집이 있다. 엄마가 10년 전 다녀온 그리스 여행을 떠올리며 흰 집을 고집했다. 위가 짧은 기역자 모양의 건평 34평 집은, 세로가 긴 직사각형 80평 땅 위에 있다. 그래서 작은 잔디 마당을 둘러 안은 모습이었다. 사실 옆과 뒤로도 사람 한명이 간신히 지나갈 크기의 땅이 집을 둘러 싸고 있어서, 엄마는 그 땅에마저 도라지도 심고, 복숭아도 심고, 먹을 수 있다는건 다 심었다.


현관 옆 계단 밑 가장 작은 방이 내 방이었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북향 창가에 12년 된 흰 공주풍 침대가 있고, 평일에 들여다보지 못한 침대 위엔 종종 커다란 초콜릿 상자가 있었다. 맛이 비슷하지만 모양은 한껏 다른 초콜릿이 열을 맞춰 곱게 누워 있었다. 다 먹기도 전에 초조한 마음으로 바닥을 들추면 아까와 같은 초콜릿이 또 새로운 열을 맞춰 곱게 누워 있었다. 마당에 앉아 어려운 책을 읽고 초콜릿을 먹었다. 다음 주말에 또 먹을 만큼을 남겨 두었다. 주말의 초콜릿만큼은 언니에게도 뺏기지 않을 것 같았다. 언니는 그 집에 나만큼 자주 오지 않았기 때문에.


4년 후, 간절히 집을 떠나고 싶었다. 남겨둔 초콜릿 때문에 떠날 수 없었다. 그리울 거였다. 두번째 집이 유일한 집이 되면서부터 집은 전과 같이 침대 위 멋진 초콜릿 상자를 만들어내지 못했지만, 간절히 떠나고 싶은 감옥이었지만. 여전히 마당엔 눈이 쌓였고 잔디의 새순이 보송했고 벽을 따라 붉은 장미가 가슴을 덮었다. 보리수가 황금빛으로 빛났고 복숭아는 매번 두세개의 알을 품었으며 다섯 송이의 포도가 열렸다. 담장이 없어도 거실 창을 활짝 열어두고 여름 밤 속을 날으며 꿈을 꾸었고 마당에는 종종 이웃의 텃밭에서 난 상추와 오이가 신문지를 덮고 우리의 귀가를 기다렸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해가 뜨면 뜨는 대로, 유럽식 흰 집은 마법을 잃은 채 작은 잔디 마당을 안고 내가 집에 돌아오길 기다렸다. 떠날 수 없었다. 집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5년 후, 집을 떠났다. 6년 후, 집은 부동산의 흰 종이 검은 글씨로 올랐다. 7년 후 가장 큰 이삿짐 트럭이 오고갔다. 그렇게 돌아갈 곳이 없어진 즈음 나는 제주에 정착했다. 2년간 수십개의 집을 전전하고 나서. 비로소 독립 생활을 받아들였다. 잔디마당도 초콜릿도 없고 엄마도 언니도 없는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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