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복 입는 운동이 매력적인 이유
학교 수업을 마치고 나면 남자아이는 태권도장, 여자 아이는 피아노 학원에 가는 일이 국룰이었던 때가 있었다. 흰색 도복을 입고 띠를 채찍처럼 휘두르며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남자아이와 삼삼오오 모여서 크고 납작한 피아노 학원 가방을 손에 쥔 여자 아이들의 수다가 하굣길 기본 풍경이었다. 크레파스 하나로도 남자색이니 여자색이니 하면서 싸우는 게 일상이었던 아이들 틈에서 나는 태권도장에 다닌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었다. 친했던 여자 아이들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고, 짓궂은 아이들로부터 '조폭 마누라'와 같은 놀림 소리를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도 매주 3회씩 꼬박꼬박 도장에 다녔다. 가기 싫다고 떼를 쓰다가 엄마의 불호령과 함께 차박차박 가는 날도 없지는 않았지만 막상 도장에서는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흰색 도복을 입고, 같은 옷을 입은 아이들과 어울리다 보면 어느덧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고, 집에 와서도 저녁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같은 학교 친구, 다른 학교 친구, 동네 동생과 언니, 오빠들까지 길거리에서 반갑게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얼굴도 많아졌다.
엄마도 안심했던 것 같다. 걸음마도 느렸고 자전거 보조바퀴도 또래보다 늦게 뗀 나의 더딘 운동신경을 걱정했었고, 아침마다 학교에서 읽을 책을 싸가며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대화는 하냐는 질문에는 책 읽는 게 더 재밌어서 그럴 시간이 없다고 답하는 딸이 오죽 답답했을까.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딸과 아들 모두를 태권도장에 보냈던 데에는 또래와 함께 어울리며 튼튼하게 자라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도복 빨래하기는 질색했다. 편안한 움직임을 위해 품이 크게 만들어진 도복은 세탁기를 가득 채웠고, 한 번 물을 먹으면 탈수를 돌려도 묵직했다. 여러 벌을 구비해 돌려가며 입는 운동복이 아니다보니 세탁을 미루기도 곤란했고, 온통 흰색이라서 무언가 묻으면 지워내는 것도 일이었다. 그래도 태권도는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다닐 수 있는 학원이었다. 검도나 수영과는 다르게 장비에 대한 초기 비용이 들지 않았다. 도복은 등록하면 선물로 주곤 했고 새 친구를 데려와 등록시키면 한 달치 할인도 해주곤 했다. 짐작만 하는 거지만 이웃집에서 운영한 도장을 다녔기 때문에 지인 찬스도 받지 않았을까? 어찌 되었든 그때는 나도 엄마도 알지 못했다. 도복과의 인연이 20년 넘게 이어질 줄은 말이다.
"여기 도복은 검은색이야, 신기하지?" 도장 등록을 위해 빌렸던 신용카드를 반납하며 엄마에게 말했다. 그러나 이미 수년간 동생의 태권도복과 함께한 엄마는 더 이상 도복에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고양이 털을 떼어내려면 고생하겠다는 한 마디가 전부였는데 이는 오랜 가사 경력에서 우러나온 완벽한 예측이었다. 이 검은 도복을 입을 때마다 나는 박스테이프를 무기로 털과의 전쟁을 치렀다. 대신 격한 움직임 때문에 혹시나 새지 않을까 염려되는 월경 기간에는 심리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었다.
전학을 핑계로 벗어던진 태권도복에 이어 이번에는 자의로 도복을 입게 되었다. 새롭게 확장된 신도시의 끝에 위치한 도장으로 말은 특공무술을 가르친다지만 내가 배운 건 뺀질거리기였다. 운동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도장은 야자 하기 싫어서, 공부하기 싫어서 친한 친구와 함께 찾은 피난처였다. 등록한 다음날에는 바로 교무실에 갔다. 계란을 닮았던 담임 선생님께 고3이 되기 전에 체력을 키워보려고 운동 학원을 등록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야자에 참여할 수 없다고 밝혔다. 눈에 빤히 보이는 핑계였지만 귀찮았는지 어쨌는지 허락은 쉽게 받았고 그날 이후로 '공부보다는' 할만한 특공무술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몸에 걸친 도복은 태권도복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드럽고 움직이기 편했다. 딱 맞게 입어야 예쁜 교복과 당시 유행하던 스키니진 대신 여유로운 도복을 입고 정말 원 없이 움직였다. 몸을 한껏 웅크렸다 펼쳐도 재봉 터질 걱정이 없고, 어떤 운동복을 사 입어야 할지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세탁해서 햇볕에 잘 말려두었다가 도장에 가는 날 아침 개어서 챙기면 끝이었다. 그곳에서는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 운동했다. 키와 덩치에 따라 옷감이 조금 덜 들거나 더 든 정도의 차이만이 있었을 뿐이므로, 나이와 성별을 따지지 않고 한데 어울려 운동할 수 있었다.
도복은 일종의 단체복이다. 일종의 상징으로 작용해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소속감과 유대감을 선사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교복도 군복도 같은 기능을 한다지만 도복은 내가 고른 운동, 내가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과의 유대를 쌓는다는 점에서 불쾌할 일이 없었다. 뭐든 스스로 골라야 가시밭길이든 잘 닦인 왕복 8차선 도로든 만족스럽게 걸어갈 수 있는 법이다. 유대감 덕분인지 서로 돕는 풍경도 흔했다. 몸이 뻣뻣해서 그라운딩 기술을 좀처럼 따라 하지 못한 내게 유연한 몸으로 여러 번 시범을 보이며 알려준 초등학생이 있었고, 띠를 매기 어려워하는 아이들의 띠를 묶어주는 내가 있었다. 같은 성별이라면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머리끈을 빌려주며 유대를 쌓았다. 유독 머리끈은 쓸모와 예쁨을 모두 갖춰서 때때로 호의를 드러내는 선물이 되기도 했다. 다만 이 모든 일은 도복을 입었을 때만 가능했다.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도장 밖을 나서면 서로가 철저히 선을 그었다.
지금도 검은 도복은 잘 쓰지 않는 붙박이장 한쪽 구석에 걸려 있다. 버릴까 싶다가도 이 옷을 입었을 때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 나름대로 많은 동작을 소화해냈던 리즈 시절 내 몸을 떠올리다 보면 좀처럼 버릴 수가 없다. 어디 피난이라도 가지 않는 이상 계속 끌어안고 살지 않을까? 더는 입지 않는 옷을 놓지 못하는 걸 보면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는 역시 글렀다.
지금 입는 도복은 운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선명한 파란색과 빳빳함이 매력적이다. 역시나 등록하고 선물 비슷한 개념으로 받아왔다. 주짓수는 손으로 깃을 잡는 운동이라서 유독 두툼한 깃이 인상적이다. 도복은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은근한 차이가 있어 비교해보면 꽤 흥미롭다.
태권도와 특공무술은 허리가 고무줄이어서 입고 벗기 편하지만 운동하고 나면 빨간 고무줄 자국이 남거나 가렵기도 했다. 그러나 주짓수는 끈을 당겨 묶어 내 몸에 맞게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다. 화장실을 다녀오기 불편하지만, 미리 다녀오면 될 일이다. 게다가 땀을 흘리다 보면 용변 보고 싶은 욕구가 생길 틈이 없기도 하다. 옷감 두께에도 차이가 있다. 주짓수가 더 두꺼운 편으로 바닥에 떨어질 때 충격을 완화해준다고 한다. 무릎 부분은 천을 덧댄 듯 더 두껍다. 지금이야 폭신한 매트 위에서 수련하지만, 어린 시절 태권도 도장을 떠올려보면 일부만 폭신하고 나머지는 마루나 딱딱한 바닥이었다. 바닥에 내동댕이 쳐질 위험이 높은 주짓수라면 조금이나마 낙하 충격을 줄여줄 수 있는 도톰한 두께의 도복을 입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상의를 보자면 앞섶을 여미지 않는다는 점에서 태권도 도복이 유별나다. 그러니까 태권도복은 깊이 파인 V넥 티셔츠와 비슷한 형태이다. 덕분에 띠를 매지 않아도 옷이 풀어헤쳐질 염려가 없고 가슴과 배에서 옷감이 2겹이 되지 않아 상대적으로 가볍고 간단하다. 선수용 도복은 다를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어린아이들도 입고 벗기 편하고, 격한 경기를 치른 후에도 정갈한 모습이 유지된다는 점이 꽤나 마음에 든다. 그에 반해 주짓수는 뭐랄까 야성미가 돋보인다. 동여맨 띠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소매를 잡아채고 깃을 당기는 과정에서 상의가 풀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떤 도복이 가장 좋았다고 꼽아보는 일은 무의미하다. 각 도복이 그러한 꼴을 갖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태권도복을 입고 주짓수를 하면 옷이 찢어질 위험이 있고, 특공무술 도복을 입고 태권도를 하면 동작을 할 때 멋과 기품이 덜 드러날 것이다. 현시대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수련에 적합한 형태를 갖추려는 무도인들의 연구가 있었고, 대회나 시범의 측면에서 보자면 균등한 실력 행사의 기회를 위해 표준화된 유니폼을 맞추려는 의지가 모여 오늘날의 도복이 만들어졌으니, 안전한 수련을 위해서라도 도복을 갖춰 입는 게 마음이 편하다. 규격화된 맞춤형 옷이라는 점이 도복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이다.
최근에는 도복의 색과 모양새가 더 다양해지고 패치 등으로 개인이나 도장의 개성을 드러내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변화에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내는 분들도 있을 테지만, 진지함보다는 호기심이 더 많은 초보 수련자 입장에서는 폭넓은 방식으로 이 운동에 대한 관심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사장된 운동이라면 오직 '도복 복원'만 가능할 뿐 '도복 개량'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만간 새 도복을 사러 갈 생각이다. 어떤 색을 살지, 촉감과 모양은 어떤 것으로 고를지 상상해본다. 상하의를 다른 색으로 입어보는 건 어떨까? 첫 내돈내산 도복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럼 이만, 몸에 쏙 맞는 도복을 입고 땀 흘리기 위해 돈 벌러 갈 시간이다. 뿅.
저처럼 도복 입기 좋아하시는 분 계시다면 손 번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