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형 사람이 스케줄러를 채우는 법
더는 스케줄러를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약속과 여행 일정을 잡지 못하게 되자 이렇다 할 적을 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말마따나 사무직 월급쟁이로 사는 일상은 꽤나 규칙적이고 단조로웠다. 지난날을 들춰보며 감상에 빠지는 취미도 없어서 이 날은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먹고 보고 즐길지 적는 게 전부였다. 다꾸라고 해봤자 중요한 날에 스티커를 붙이고 때때로 영화표와 탑승권 같은 기념할 만한 종이가 생기면 끼워 넣는 게 전부였다.
막상 2021년을 스케줄러 없이 살아보니 편하지만은 않았다. 종이 낭비라고 생각했는데 안 쓰니까 아쉽고 일정 정리도 잘 되지 않았다. 손으로 한 번 더 적을 때 몸 어딘가에 그 일이 각인되기라도 하는 걸까? 어떤 날은 약속을 잡은 시간에 영화를 예매하기도 했다. 결국 교보문고에 책 구경 갔다가 11월부터 사용할 수 있는 다이어리를 사버렸다. 보라색에, 손바닥만 한 작은 크기로. 선호했던 월간+주간이 세트로 묶여 반복되는 양식이었다.
새 종이 냄새를 맡으며 1년 치 공휴일 분포를 살펴본다. 언제 얼마만큼 연차를 쓸지 가늠해본다. 설날 3일, 삼일절, 대선, 어린이날, 지방선거, 현충일, 광복절, 추석 2일, 개천절, 한글날. 바뀔 가능성도 있지만 우선은 회사를 13일이나 덜 나가도 된단다! 얄짤 없는 4, 7, 11, 12월에는 연차를 2개씩 팍팍 써주리라. 아쉽게도 부처님 오신 날은 일요일이다. 어버이날도 겹쳤다. 성탄절도 일요일인 걸 보니 2022년 종교 휴일은 욕심부리지 말고 경건하게 보내라는 뜻인가 싶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모든 종교의 기념일 하루씩을 뽑아 모두 다 휴일로 챙겨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펜을 들고 가장 먼저 1월 1일과 12월 31일, 그리고 내 생일을 표시한다. 이어서 가족 이벤트와 주변인 생일마다 스티커를 붙이고 이름을 적는다. 올 한 해, 무심히 넘어가버렸던 이벤트를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는다. 끝. 빈 곳이 많지만 아직 펜을 댈 때가 아니다. 이번 스케줄러는 'To do'가 아닌 'Done'으로 채우는 중이기 때문이다.
Done list, 그러니까 한 일 목록은 최근에 인식한 개념이다. 알게 되었다고 표현하지 않은 이유는 이미 피아노 학원을 다니던 시절에 포도송이를 채웠던 유사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연습 한 번 하고 포도송이 하나에 색을 칠한다. 그렇게 모든 포도송이를 채우면 집에 갈 수 있었다. 몰래 두세 개씩 칠한 적도 왕왕 있었지만, 어쨌든 다 채우고 가면 세상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선생님들도 몇 개씩 동시에 칠할 걸 생각해 일부터 더 많은 포도송이를 그려줬으리라 생각한다. 남은 30분 동안 그 횟수를 다 채우기란 불가능하다
각설하고 22일간 새로운 규칙으로 스케줄러를 운용하며 소소한 재미를 보고 있다. 기록하는 시간축을 살짝 비틀었을 뿐인데 이렇게 다양한 변화가 찾아올 줄이야! 우선, 갑작스러운 변화에도 관대해진다. P 유형이 살아가는 방식인 상황에 따른 융통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셈이다. 세상 일은 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약속이 취소되기도 하고,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컨디션이 좋지 않아 그날 해야 할 일을 못 해낼 때가 있다. 그전에는 이미 적어놓은 일을 해내지 못했다는 생각에 찜찜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냥 "집에서 잘 쉼 :-D"이라고 적으면 끝. 더는 계획에 짓눌려 과도하게 초조하고 피곤한 감정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제시간에 끝내지 못한 일에 대한 죄책감 대신, 내가 이만큼 해냈다는 뿌듯함도 생긴다. 계획을 완료했을 때 느끼는 성취감이 없거나 덜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잃을지 얻을지 단정할 수 없는 성취보다는 손에 잡힌 성취를 마음껏 즐기겠다는 쪽에 가깝다. 작은 성취일지라도 쌓이면 삶을 유쾌하게 바꾸어준다. '작은 승리의 과학(Science of Small Wins)*이다. 예시로 어제 내가 이룬 성취 일부는 다음과 같다: 친구와의 약속에 늦지 않고 배부른 식사를 함께함. 다이소에서 화장솜 구매(다른 상품에 혹하지 않음). 내일 가져갈 도복을 잘 개어둠. 스페인어 단어 10개 익힘. 만약 To do list를 적었다면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아침 스트레칭(늦잠 자서 못함). 11시 00역에서 00 만나기. 00에서 식사(웨이팅 길어서 다른 데 감). 화장솜 구매. 스페인어 이번주 진도 복습(게임 오래 해서 시간 뺏김). 내 하루는 이렇게 무미건조하지 않았고, 지키지 못한 일정과 반성으로 가득 찬 절망의 날도 아니었다. 이미 내 기를 죽이는 일은 곳곳에 수두룩하다. 굳이 나까지 스스로 나서서 부정적인 감정을 고조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자신을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지표가 되어주기도 했다. 수요일까지 해낼 수 있을 거라 예단했던 일을 금요일이 되어서야 끝내는 경우가 잦다. 현실감 없이 효율이라는 이상으로만 쌓은 계획인 탓이 컸다. 나는 그렇게 경주마 같은 사람이 아닌데. 쌓이는 건 자책과 피로뿐이었다. 그러나 한 일을 적어서 실제로 걸린 시간을 확인하게 되자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인지하고 피드백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내 행동 양상에 대한 객관적인 데이터를 쌓아둔다면 정말 중요한 일을 앞두고서도 내게 제격인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P도 필요할 때는 계획을 세워야 하니까.
한편, 해 온 일을 보면 앞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빤히 보인다. A를 사고 B를 해봤으니, 그다음으로는 C를 해봐야겠다거나, 벌써 A를 했으니 미루지 말고 B도 조만간 해치워버려야겠다는 식이다. 한 일을 살펴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의 영감을 얻는 것도, 굳이 적기 않아도 내가 해야 할 일이 선명히 보이는 것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뚜렷한 목표와 당위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이상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이지 않고, "왜?"를 탐구하는 _N_P에게는 이렇게 등 떠미는 이유가 뻔히 보여야 실행력이 높아지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외에도 계획을 적고 잘 행했는지 체크하는 번거로움 없이, 한큐에 오늘 칸을 채울 수 있는 것도 마음에 든다. '계획'이 아닌 '계획 관리하는 일'에 두 번이나 시간을 들이고 싶지 않다.
이대로 일 년이 지나고 나면 이 방식의 장점도, 반대로 단점도 더욱 선명히 보일 것이다. 더 좋아질 수도 아니면 치명적인 단점을 발견해 해결하려고 머리 싸매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끝내지 못한 일'이 아닌 '해낸 일'로 나를 채워갈 테다. 이 글을 발행하고 나면 오늘, 그러니까 11월 23일 월요일 칸에 브런치 글 발행함부터 적어야지. 이렇게 또 한 줄이 새겨진다. 행복하다.
* Janet Choi 등의 책인 <The Busy Person's Guide to the Done List: The Science of Small Wins>의 부제에서 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