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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염부 Nov 22. 2021

'To do' 말고 'Done'

P형 사람이 스케줄러를 채우는 법

더는 스케줄러를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약속과 여행 일정을 잡지 못하게 되자 이렇다 할 적을 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말마따나 사무직 월급쟁이로 사는 일상은 꽤나 규칙적이고 단조로웠다. 지난날을 들춰보며 감상에 빠지는 취미도 없어서 이 날은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먹고 보고 즐길지 적는 게 전부였다. 다꾸라고 해봤자 중요한 날에 스티커를 붙이고 때때로 영화표와 탑승권 같은 기념할 만한 종이가 생기면 끼워 넣는 게 전부였다. 


막상 2021년을 스케줄러 없이 살아보니 편하지만은 않았다. 종이 낭비라고 생각했는데 안 쓰니까 아쉽고 일정 정리도 잘 되지 않았다. 손으로 한 번 더 적을 때 몸 어딘가에 그 일이 각인되기라도 하는 걸까? 어떤 날은 약속을 잡은 시간에 영화를 예매하기도 했다. 결국 교보문고에 책 구경 갔다가 11월부터 사용할 수 있는 다이어리를 사버렸다. 보라색에, 손바닥만 한 작은 크기로. 선호했던 월간+주간이 세트로 묶여 반복되는 양식이었다.


새 종이 냄새를 맡으며 1년 치 공휴일 분포를 살펴본다. 언제 얼마만큼 연차를 쓸지 가늠해본다. 설날 3일, 삼일절, 대선, 어린이날, 지방선거, 현충일, 광복절, 추석 2일, 개천절, 한글날. 바뀔 가능성도 있지만 우선은 회사를 13일이나 덜 나가도 된단다! 얄짤 없는 4, 7, 11, 12월에는 연차를 2개씩 팍팍 써주리라. 아쉽게도 부처님 오신 날은 일요일이다. 어버이날도 겹쳤다. 성탄절도 일요일인 걸 보니 2022년 종교 휴일은 욕심부리지 말고 경건하게 보내라는 뜻인가 싶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모든 종교의 기념일 하루씩을 뽑아 모두 다 휴일로 챙겨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펜을 들고 가장 먼저 1월 1일과 12월 31일, 그리고 내 생일을 표시한다. 이어서 가족 이벤트와 주변인 생일마다 스티커를 붙이고 이름을 적는다. 올 한 해, 무심히 넘어가버렸던 이벤트를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는다. 끝. 빈 곳이 많지만 아직 펜을 댈 때가 아니다. 이번 스케줄러는 'To do'가 아닌 'Done'으로 채우는 중이기 때문이다.


완벽하지 않거나 확실히 지켜내지 못할 계획을 세우느니 '아무것도 안 하기'를 적는 게 속이 편하다.


Done list, 그러니까 한 일 목록은 최근에 인식한 개념이다. 알게 되었다고 표현하지 않은 이유는 이미 피아노 학원을 다니던 시절에 포도송이를 채웠던 유사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연습 한 번 하고 포도송이 하나에 색을 칠한다. 그렇게 모든 포도송이를 채우면 집에 갈 수 있었다. 몰래 두세 개씩 칠한 적도 왕왕 있었지만, 어쨌든 다 채우고 가면 세상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선생님들도 몇 개씩 동시에 칠할 걸 생각해 일부터 더 많은 포도송이를 그려줬으리라 생각한다. 남은 30분 동안 그 횟수를 다 채우기란 불가능하다


각설하고 22일간 새로운 규칙으로 스케줄러를 운용하며 소소한 재미를 보고 있다. 기록하는 시간축을 살짝 비틀었을 뿐인데 이렇게 다양한 변화가 찾아올 줄이야! 우선, 갑작스러운 변화에도 관대해진다. 유형이 살아가는 방식인 상황에 따른 융통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셈이다. 세상 일은 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약속이 취소되기도 하고,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컨디션이 좋지 않아 그날 해야 할 일을 못 해낼 때가 있다. 그전에는 이미 적어놓은 일을 해내지 못했다는 생각에 찜찜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냥 "집에서 잘 쉼 :-D"이라고 적으면 끝. 더는 계획에 짓눌려 과도하게 초조하고 피곤한 감정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제시간에 끝내지 못한 일에 대한 죄책감 대신, 내가 이만큼 해냈다는 뿌듯함도 생긴다. 계획을 완료했을 때 느끼는 성취감이 없거나 덜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잃을지 얻을지 단정할 수 없는 성취보다는 손에 잡힌 성취를 마음껏 즐기겠다는 쪽에 가깝다. 작은 성취일지라도 쌓이면 삶을 유쾌하게 바꾸어준다. '작은 승리의 과학(Science of Small Wins)*이다. 예시로 어제 내가 이룬 성취 일부는 다음과 같다: 친구와의 약속에 늦지 않고 배부른 식사를 함께함. 다이소에서 화장솜 구매(다른 상품에 혹하지 않음). 내일 가져갈 도복을 잘 개어둠. 스페인어 단어 10개 익힘. 만약 To do list를 적었다면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아침 스트레칭(늦잠 자서 못함). 11시 00역에서 00 만나기. 00에서 식사(웨이팅 길어서 다른 데 감). 화장솜 구매. 스페인어 이번주 진도 복습(게임 오래 해서 시간 뺏김). 내 하루는 이렇게 무미건조하지 않았고, 지키지 못한 일정과 반성으로 가득 찬 절망의 날도 아니었다. 이미 내 기를 죽이는 일은 곳곳에 수두룩하다. 굳이 나까지 스스로 나서서 부정적인 감정을 고조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자신을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지표가 되어주기도 했다. 수요일까지 해낼 수 있을 거라 예단했던 일을 금요일이 되어서야 끝내는 경우가 잦다. 현실감 없이 효율이라는 이상으로만 쌓은 계획인 탓이 컸다. 나는 그렇게 경주마 같은 사람이 아닌데. 쌓이는 건 자책과 피로뿐이었다. 그러나 한 일을 적어서 실제로 걸린 시간을 확인하게 되자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인지하고 피드백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내 행동 양상에 대한 객관적인 데이터를 쌓아둔다면 정말 중요한 일을 앞두고서도 내게 제격인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P도 필요할 때는 계획을 세워야 하니까.


한편, 해 온 일을 보면 앞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빤히 보인다. A를 사고 B를 해봤으니, 그다음으로는 C를 해봐야겠다거나, 벌써 A를 했으니 미루지 말고 B도 조만간 해치워버려야겠다는 식이다. 한 일을 살펴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의 영감을 얻는 것도, 굳이 적기 않아도 내가 해야 할 일이 선명히 보이는 것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뚜렷한 목표와 당위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이상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이지 않고, "왜?"를 탐구하는 _N_P에게는 이렇게 등 떠미는 이유가 뻔히 보여야 실행력이 높아지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외에도 계획을 적고 잘 행했는지 체크하는 번거로움 없이, 한큐에 오늘 칸을 채울 수 있는 것도 마음에 든다. '계획'이 아닌 '계획 관리하는 일'에 두 번이나 시간을 들이고 싶지 않다.


이대로 일 년이 지나고 나면 이 방식의 장점도, 반대로 단점도 더욱 선명히 보일 것이다. 더 좋아질 수도 아니면 치명적인 단점을 발견해 해결하려고 머리 싸매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끝내지 못한 일'이 아닌 '해낸 일'로 나를 채워갈 테다. 이 글을 발행하고 나면 오늘, 그러니까 11월 23일 월요일 칸에 브런치 글 발행함부터 적어야지. 이렇게 또 한 줄이 새겨진다. 행복하다.




Janet Choi 등의 책인 <The Busy Person's Guide to the Done List: The Science of Small Wins>의 부제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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