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만한 어쓰본.
체스를 만난 날, L.T의 첫 번째 감상이었다. 무엇 하나 결론 난 것 없었지만 고갈된 도시의 자원과 정화 필터의 수명에 레인저스의 운명이 정해졌다. 출정이 확정되자마자 L.T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자리를 꿰차기로 했다.
거만하고 고요한, 속을 알 수 없는 어쓰본.
55는 알기 편했다. 넉살 좋고 완벽한 외형의 친근한 모델은 위화감이 느껴질지 언정 선명한 호의를 품고 있곤 했다. 휴처럼 목적성이 있는 쪽은 더 간단하다. 목표 의식이 있는 한 부여받은 역할만 완수한다면 좋은 파트너가 되기에 오히려 상대할 만하다. 체스는 세상을 응시하고 판단하고 그리고 숨긴다. 달갑지 않다. 루머의 출력을 이론값까지 끌어올린 주력인 가마우리의 출정을 막을 수 없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서로를 각별하게 챙기는 그들의 기행은 익히 들어왔지만 설마 하니 그림자마냥 체스를 달고 올 줄은 몰랐다. 들리는 소문 중 사실이 얼마나 되는 세상이던가. 그래서 그들이 사지를 향해서도 발맞춰 걸으리라고는 짐작지 못했다. 아니 알려진 대로 체스가 인간의 인지와 가장 일치율이 높은 코어를 가지고 있다면 설마 죽음에 스스로 뛰어드는 어리석은 선택은 하지 않으리라 은연중에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깨달았다. 자신조차도 욕망을 위해 끝이 정해진 연극에 기꺼이 자원했지 않은가. 체스 또한 욕망 앞에 한없이 충실한 개체라는 것을. 그러니까 체스는 진정한 earth-born, 지구 태생이었다. 그것도 높은 수준의 ego-level을 가지고 태어나 자기 불신을 넘어 선 완벽한 개체. 날 때부터 결합 없는 프로그램 위에 서서 스스로의 시야를 구축한 견고한 사고형 어쓰본.
그러니 가끔 가마우리의 눈빛에서 보이는 자랑스러움은 어쩌면 당연하다. 어떤 이유에서도 인간의 선함을 배반하지 않고 선택할 거라는 믿음, 오히려 가마우리는 체스가 택할 옳기만 한 결정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보고 L.T 조차도 체스가 부여받은 역할이 생기는 순간 정직하게 본분에 충실한 선택을 할 것을 은연중에 믿었다. 덕분에 한쪽 팔이 장렬하게 날아가고도 이렇게 살아있지 않은가.
반푼이 L.T
이제야 이름에 걸맞은 진정한 자신이 되었다. 그를 들쳐 엎은 체스와 55의 루머의 속력이 서서히 줄어든다. 에워싼 베일은 천천히 걷히고 온통 잿빛의 두려움만 가득하던 공간이 느슨해지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어렴풋이 들여왔다. 살아남고 모두를 구조하기 위해, 그 목적만을 향해 움직이는 그들 뒤로 어디선가 나타난 과거의 유령들에게 다시 에워 쌓였다.
주제를 모르는 배신자, 비겁자, 도망자
가짜 사령관이 된 도망친 말단 보초병.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뚜렷하게 외치고 있었다. 동료들을 등지고 수풀기로 내달리게 한 그의 본능이 말한다.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무너진 인류가 제대로 된 기록 하나 남기지 못했지만 명백한 방황 사건이었던 그 재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