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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음부터 잘 키우자 Jun 17. 2021

중앙시장의 시그니처. 그건 맛이 아니었다

여행 정보 없는 여행 책 19

커피콩빵, 초당순두부, 김치말이삼겹살, 닭강정, 육쪽마늘빵, 오징어순대, 중화짬뽕빵, 꽃게그라탱, 어묵크로켓, 3개씩 파는 닭다리 튀김, 생과일주스.


강릉 중앙시장에서 만난 맛난 맛들이다.

     


중앙 시장의 외형은 참 독특했다. 겉에서 보면 깔끔한 상가건물에 들어앉은 가게 같았는데 안에 들어서자 낯익은 시장의 거리였다. 들어서면서부터 후각과 시각을 자극하는 주전부리들이 가득했다. 북적이는 사람들, 시끌시끌한 소리, 물건과 음식을 주고받으며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말소리. 안은 익숙한 풍경인데 겉은 뭔가 정돈된 느낌의 사뭇 다른 시장의 모습이 신선했다.



어린 시절 나에게도 중앙시장이 있었다.
 
강릉 중앙시장이 아니라 울산 중앙시장이다.

 

어느 도시에나 있을 법한 흔한 이름 '중앙시장' 내 기억 속의 울산 중앙시장은 사람들로 가득한, 조금만 더 깎아 달라 한 개만 더 달라 화를 내는 건지, 웃으며 장난을 치는 건지 헷갈리는 흥정하는 소리로 시끌벅적한, 행여 길을 잃을까 어머니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녀야 했던, 어려운 미로를 온 마음을 다해 빠져나오는 듯 잰걸음을 하던 곳이었다. 그렇게 어머니를 따라 초집중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마침내 마주하는 곳이 있었다. 내가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오는 딱 하나의 이유. 바로 주전부리 가득한 포장마차 거리, 일명 먹자골목이었다.

      

달콤 짭조름한 잡채, 내 주먹보다 더 큰 왕만두, 파사삭 소리 나는 튀김, 고소하고 걸쭉한 콩국수, 얼음 동동 식혜, 통깨 가득 김밥. 먹을 것이 하도 많아서 무얼 먹어야 할지 고민이 되겠지만 난 그런 고민 따윈 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먹는 건 딱 하나 떡볶이뿐이었으니까. 떡볶이만이 나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영광의 주전부리였다.

    

그 먹자골목 포장마차의 떡볶이는 빨간 고추장 양념에 검은 통깨가 가득했고 떡은 다른 곳과 다르게 조금 굵었다. 즉석 떡볶이들이 절대 따라 할 수 없는 매콤 달콤 걸쭉한 맛을 내었다. 매워서 호호 불며 떡볶이를 먹다 보면 옆에 순대 한 접시가 자리를 잡는다. 어머니의 선택을 받은 녀석이다. 순대 맛은 특별하지 않았다.

     

특별한 건 순대를 써는 아주머니의 도마와 칼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순대와 함께 했는지 나무로 된 커다란 도마는 가운데가 움푹 파여 있었다. 그렇게 움푹 파인 도마에서 순대가 잘도 썰려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서커스 같았다. 순대를 써는 아주머니의 손은 또 얼마나 빠른지. 나이가 들면 시간이 빠르다는데 그 아주머니의 칼질 솜씨도 시장에서 지낸 그 세월만큼이나 빨라져 있었다. 아주머니의 빠른 손을 보다 보면 칼자루의 크기에 어울리지 않는 작고 길쭉한 칼이 보인다. 칼도 도마에 뒤질세라 함께 이 시장의 터줏대감으로 산 세월을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맛집을 찾는다. 찾아진 맛집의 가장 인기 메뉴는 당연히 그 맛집의 시그니처가 된다. 내 어린 날의 중앙시장 주전부리 포장마차 먹자골목의 시그니처는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아니라 움푹 파이고 작고 길쭉하게 갈린 그 도마와 칼이었으리라. 파이고 갈린 만큼 아주머니 자식의 학비가 되었을 테고, 시장을 오가는 사람들의 허기를 달래주었을 테고, 시장에 대한 한 장의 흑백 사진 같은 기억을 만들어 주었으리라.  

   

나는 오늘 울산 중앙시장이 아니라 강릉 중앙시장에서 짝꿍과 함께 김치말이삼겹살과 꽃게그라탱과 3개씩 살 수 있는 닭다리 튀김과 오렌지를 가득 갈아 넣은 주스를 사서 바로 옆 월화 거리에 자리를 잡았다. 짝꿍과 함께 꽃게그라탱을 한 입씩 나눠먹고는 늘 그렇듯 잊어버리고 있던 음식 사진을 찍었다. 우리의 음식 사진은 늘 한입씩 먹은 상태이다. 눈보다는 입이 중한가 보다.

   

사진 속 소박한 주전부리와 함께 월화의 거리의 공기와 내 짝꿍과 맛을 음미하 이 순간이  어느 날 강릉 중앙시장을 떠올렸을 때 시그니처로 기억되리라.      



[photo by 짝꿍]



#중앙시장 #주전부리 #강릉 #강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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