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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음부터 잘 키우자 Jun 29. 2021

원조의 손 맛. 외할머니의 김치를 기억하다

여행 정보 없는 여행 책 20

초당순두부. 강릉에 가면 꼭 먹어봐야 하는 맛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 두부란 된장찌개에 살짝 들어가는, 어쩌다 빈 맛의 공간을 채우는 엑스트라일 뿐. 두부김치에서 조차 내게 주인공은 김치였다. 그런 두부를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참으로 힘든 선택의 순간이 왔다. 다행히 친절하고 다정한 나의 짝꿍은 내가 좋아하는 짬뽕에 순두부를 넣어서 만드는 짬뽕순두부찌개를 찾았다며 같이 먹어보자고 한다. 짬뽕 맛이라는 말에 없던 식욕을 돋우며 지도 앱을 들고 뚜벅뚜벅 음식점을 찾았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꽤 많았다. 맛집인가 보다 했는데 여지없이 간판에는 '원조'라는 단어가 걸려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옆 집도 원조란다. 


원조란 단어에는 처음이란 뜻이 담겨 있지 않은가.  아마도 모든 음식점에서 순두부찌개를 끓이겠지만 음식점마다의 고유한 맛은 모두 다를 것이고, 그 다른  맛은 그 음식점만의 맛일 터이니 모두 원조라는 단어가 맞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알쏭달쏭하다.


짝꿍과 식당에 자리를 잡은 후 고민할 필요도 없지만 여러 가지 메뉴를 준비해 둔 사장님의 정성을 생각하여 메뉴판을 쭉 훑어보고는 이미 계획했던 대로 짬뽕순두부찌개를 주문했다. 나의 짝꿍은 원조의 맛을 제대로 느껴보기 위해 그냥 완전한 아무런 수식어가 없는 순두부찌개를 주문했다. 짬뽕순두부찌개는 정말 짬뽕 맛으로 얼큰하니 딱 좋은 맛이었다. 그런데 짝꿍의 순두부찌개는 정말 하얗고 하얗고 하얀 두부만 뚝배기 가득 보글거리고 있었다. 같이 곁들여 먹는 간장도 나왔는데 나는 순두부찌개를 보는 내내 간장 때문에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짝꿍은 두부의 고소한 맛이 살아있다고, 정말 부드럽다고, 맛있다고 했으나 난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할 만한 맛이었다. 역시 맛도 아는 사람에게만 느껴지나 보다. 원조의 손 맛을 알아보지 못하는 난 괜히 사장님께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내게도 원조라고 기억되는 맛이 있다.


단연코 최고의 원조 손 맛은 나의 두동 만화리 외할머니다. 외할머니의 시그니처 메뉴는 김치. 그중에서도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은 동치미. 외할머니의 손맛의 결정체들이 모여 있는 광에는 커다란 아주 커다란 독들이 있었다. 독 안에는 된장, 고추장, 간장들이 늘 가득했고, 김장철이 지나면 빨갛게 버무려진 배추김치, 아삭아삭 총각김치, 은행잎 모양의 나박김치 그리고 하얗고 통통한 무가 주인공인 동치미가 한가득 독에 담겼다. 동치미가 최고의 손맛인 이유는 정말 재료가 무외에는 거의 안 들어가기 때문이다. 간간히 배 조각이나 고추들이 보이기도 하지만 실수로 빠뜨렸나 싶을 정도의 소량일 뿐이었다. 이런 동치미가 나뿐만 아니라 외가 들 모두에게 시원함과 개운함을 주는 겨울 최고의 밥도둑이 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외할머니의 비법, 손 맛 이리라.


그 손 맛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이가 바로 나의 어머니다. 어머니도 외할머니 못지않은 손 맛으로 김치를 담그신다. 내 어릴 적에는 시멘트 마당이 있는 주택에 살았다. 김장철이 되면 마당 한켠에 배추가 쌓이고 또 쌓여 높다란 벽이 하나 생겼었다. 100포기인가. 200포기인가. 기억도 가물가물한 그 시절에는 어느 집이나 그 정도의 배추 정도는 버무려줘야 김장을 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 많은 배추들이 김치가 되어 김칫독에 들어가는 날에는 온 집안에 가득한 달달한 배추 냄새와 매콤한 고추양념장 냄새가 입 속 침샘을 자극하곤 했다.


김장을 하는 날 어머니가 손으로 쭉 찢어주는 김치의 맛은 세상 어느 맛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런 매콤 달콤 쨍한 맛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다음 날에 다시 먹어보면 배추 풋내가 나고 영 맛이 없는 것이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나면 시원하고 깊은, 그냥 먹어도 김치찌개로 딱 좋은 김치 맛이 났다. 첫날 먹어보고는 꼬박 한 달을 기다려야 다시 만날 수 있는 어머니표 시원 달큼 매콤한 김치였다.


다들 맛있게 먹는 김치였지만 정말 맛있게 먹는 사람은 바로 나의 아버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의 밥상에는 강된장과 김장김치가 일 년 내내 빠지지 않았다. 다른 반찬이 있어도 아버지가 제일 좋아했던 것은 그 강된장과 김장김치였다. 밥 숟가락 소복한 하얀 쌀밥 위로 빨간 김치가 치마를 드리우며 앉으면 아버지는 맛있게 크게 한 입 드셨다. 입이 작아서 일까 아님 양껏 뜬 밥숟가락의 밥이 많아서 일까 늘 아버지의 오른쪽 입술 옆에는 밥알이 꼭 하나씩 붙어있곤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그 옆에 붙은 밥알은 내일 먹을라고.'라고 말하며 떼주곤 하셨다. 마치 드라마 재방송을 보는 듯 매일 같은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제 아버지는 그리움이 되었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김장을 담그신다. 달라진 건 이제 50포기 정도만 한다는 것이다. 그중 20포기가 내 차지가 된다. 이 20포기의 김치가 택배 상자에 담겨 배달되기를 기다리는 이가 나 말고도 또 한 명 더 있다. 바로 내 딸아이이다. 나와 내 아버지가 좋아한 것 못지않게 내 어머니의 김치를 좋아하는 내 딸아이는 김장철만 되면 외할머니의 김치를 기다린다. 어느 김치 보다도 외할머니의 김치가 제일 맛있다며 매워서 호호 불면서도 김치가 오자마자 손으로 찢어달라고 재촉을 하고 한 입 먹어보고는 연신 엄지 척을 해 준다.


내가 그 옛날 외할머니의 김치를 먹던 것처럼 이제는 내 딸이 내 어머니의 김치를 기다리고 먹는다. 내 딸아이의 기억 속 김치의 원조 손 맛은 내 어머니의 김치리라. 먼 훗날 내가 외할머니가 되면 과연 원조의 손 맛으로 기억될 맛이 있으려나. 오늘 저녁밥을 지으며 나만의 원조 손 맛을 한 번 찾아볼까나.



#강릉 #초당순두부 #동치미 #외할머니 #손맛 #강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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