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처음부터 잘 키우자 Jul 01. 2021

시간 박물관. 시간 안에 머물다

여행 정보 없는 여행 책 21

강릉에 처음 왔다고 생각했다. 수학여행으로 경포대나 오죽헌에 왔을지도 모르겠으나 최소한 나의 의지로 온 것은 단연코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동진 시간 박물관을 마주하는 순간 나의 머릿속의 시곗바늘이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강릉에 왔었다.


조금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정동진에 왔었다. 정동진이라며 설레었었고, 앞바다를 바라보고 여유롭게 커피도 한 잔 했으며 시간 박물관도 돌아보고 기념품으로 시계가 달린 작은 주머니도 샀다. 심지어 시계가 달린 작은 주머니는 지금도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나에게 정동진은 정동진이었을 뿐 강릉은 아니었나 보다. 고등학교 지리 선생님이 가슴을 치며 답답해할 순간이다. 아마 이 엄청난 기억의 왜곡을 내 짝꿍에게 말한다면 내 짝꿍도 지리 선생님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겠지. 말하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또다시 기억의 놀라운 왜곡을 지금 이 순간 알아차리게 되었다. 사진을 다시 보기 전까지만 해도 내 기억 속 저장 공간에는 '시간 박물관'이 아닌 '시계 박물관'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또한 절대로 내 짝꿍에게는 말하지 않으리라. 난 나의 짝꿍을 사랑하고 그의 정신적 건강함을 그 누구보다도 바라고 있으므로.


시간과 시계. 시간은 시계 안에 담기지만 시간은 시계 밖의 모든 공간에서 존재하는, 마치 불멸의 신과 같은 느낌이다. 전지전능한 그 힘으로 시간은 나를 아주 먼 미래로 보내 상상하게 만들기도 하고, 아주 아주 어린 꼬꼬마 시절로 보내 숨겨져 있던 나의 기억들을 끄집어내기도 한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어디로 가고 싶나요?

내가 대학 새내기 때 학과의 하늘 같은 1대 선배이자 시간 강사였던 전공과목 박사 과정 선생님이 던진 질문이다. 그때 나는 어디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었던 것 같다. 지금이 좋다고 생각했었다. 그때 나는 20살이었고, 대학 새내기였으며, 집을 벗어나 자취를 막 시작해 자유를 마구 마구 누리고 있었으니까. 그때 그 선배 선생님은 대학 새내기 시절로 딱 한 번만 돌아가 보고 싶다고 했었다. 어떤 책임도 없고 자유롭고 재미있었던 시절이라며, 다시 오지 않을 이 빛나는 순간을 즐기라고 했었다. 그래서 난 더 열심히 놀았던 것 같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어디로 가고 싶니?


20살 새내기를 두 번이나 지나고도 몇 년이 지난 지금 나에게 스스로 물어본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나의 11번째 해로 돌아가고 싶다. 그 선배 선생님은 즐거운 순간으로 가보고 싶다고 했지만 난 아니다. 11번째 해는 내 인생 최고의 힘든 시간이었다. 고작 11살 꼬꼬마가 뭘 안다고, 뭐 그리 힘든 일이 있었을까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11살 꼬꼬마라 힘들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 그것보다 더 힘든 건 없는 것 같다.


나의 11번째 해를 떠올리면 스쳐가는 흑백 필름이 있다. 어두운 밤, 사람들의 시끄러운 소리, 살림살이가 나뒹구는 소리, 아버지의 고함 소리 그리고 어머니의 울음소리. 나는 그 시절 내가 살아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난 마치 투명인간 같았다. 아무도 나의 마음 따윈 관심이 없었으니까. 사실 나조차도 나의 마음을 살피지 않았었다. 아니 몰랐었던 거 같다. 그래서 어찌할 바를 몰라 중력을 거슬러 공중에 떠 이리저리 나부끼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나를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마음이란 녀석이 나타나 나를 한번 끝까지 지켜보겠다고 부인, 억압, 회피, 합리화 등등 별의별 방어기제를 다 쏟아내고 있었던 것을 상담을 업으로 하는 지금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덕에 여태 하나의 생명체로 지구에 남아있나 보다. 비록 신경증 덩어리였지만.


그래서 나는 나의 11번째 해,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서 표정 없는 얼굴에 늘 가시가 돋쳐있던, 존재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그 작은 여자 아이를 꼭 한 번만 안아주고 싶다.


잘 자랄 거라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마음을 읽어주는 사람이 될 거라고.
그래서 고맙다는 말속에서 살 거라고.


지금 온전한 한 명의 사람으로 살아 있는 걸 보면 나의 11번째 해, 그 시간에 어쩜 먼 미래의 내가 한 번쯤은 시간을 거슬러 나를 만나러 와 주었던 건 아닐까. 아마도 그 먼 미래의 나는 내 마음 깊숙이 숨어 있는 참 나일지도 모르겠다. 시간마다 바뀌는 게 사람의 마음일 테지만, 절대로 나를 놓지 않는 마음이란 녀석이 찾아오는 그 시간만큼은 우리 모두가 잘 마주하길 바란다. 시간 안에서 더없이 행복하고 평화로울 수 있도록.





[photo by 짝꿍]



#정동진 #정동진시간박물관 #강원도 #강릉 #시간 #시계 








이전 20화 원조의 손 맛. 외할머니의 김치를 기억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