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난 4명의 사람들

[14일 차] 프로미스타 >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

by Zorba

[Day 14] Fromista > Carrion de los Condes


알베르게가 생각보다 쌀쌀했는지 자는 동안 몇 번을 깼다. 잠결에 옷을 몇 겹 더 껴입은 걸로 기억하는데, 그럼에도 새벽에 일어나 보니 목이 건조하고 칼칼한 느낌이 든다. 어제 비바람 사이에서 무리하게 걸은 것이 원인이었으리라. 이러한 상황은 환절기 때 종종 겪어봐서 이미 학습되어 있다. 여기서 관리를 제대로 안 하면 꼼짝없이 감기에 걸려 골골대는 신세가 될 것이 뻔하다. 평소대로라면 지금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했겠지만, 침낭 속에 더 깊숙이 들어가 무리하지 않기로 한다. 조금이라도 더 몸을 회복해야 한다.


항상 어두 껌껌한 하늘 아래서 하루를 시작하다 보니 밝은 아침이 낯설게 느껴진다. 마을 곳곳에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도 보이고, 가게들 역시 하나둘 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언제나 남들보다 일찍 출발했는데, 오늘만큼은 남들과 함께 발맞추어 걸어보려 한다. 알베르게 앞에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카페가 있어서 들어간다. 건조한 목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차를 주문하고, 이제는 고정 아침 메뉴가 되어버린 뺑오쇼콜라를 함께 시킨다. 어제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순례자들 대부분이 이 카페에 앉아있다. '내가 항상 새벽에 나갈 때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여유롭게 아침을 먹는구나.' 저 앞에 어제 만난 이냐시오가 손을 흔들었고, 우리는 함께 아침을 먹으며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따뜻하게 차를 마시며 목을 축이던 중, 부르고스에 두고 온 부산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틀간 쉬었더니 무릎 상태가 많이 좋아져서 한번 걸어봐도 될 것 같다고 전해주었다. 그간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이다. 오늘 나의 목적지인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on de los Condes)까지 버스를 타고 올 테니 거기 알베르게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한다. 아침을 마무리하고 여유롭게 길을 나선다. 몸 상태는 이전과 같지 않지만 날씨가 오랜만에 따스해서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한다. 지난 이틀간 삼일 코스를 무리해서 걸었기 때문에 오늘은 좀 여유롭게 걸으며 어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지 기대를 해본다.


첫 번째 만남은 기타를 멘 순례자이다. 캐나다에서 온 샤티라는 여자 싱어송라이터이다. 멀리 서봐도 온몸에 밝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소녀이다. 우리는 친한 친구와 하지 않는 다소 무겁고 깊은 이야기를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나눌 때가 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종종 그런 일이 발생하곤 하는데, 아마 이 짧은 만남의 휘발성이 만들어내는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순례길에서 처음 만났지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의문이라는 거대한 산 위에 공감대를 만들 수 있었다. 우리는 살면서 마주하는 수많은 상황 중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는데 샤티라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깊은 고민도 좋지만, 나는 보통 직관을 따라가는 것 같아. 그러다 보면 내가 원하는 것에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 같기도 해."


나는 쉽게 선택을 하는 법이 없다. 어떤 것이 더 나은 선택일까를 고민하다가 종종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가끔은 별생각 없이 편안하게 그때 감정에 따라서 선택하는 것이 좋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일 수 있기에. 우리는 저 앞에 큰 나무를 발견한다. 샤티라는 그 나무에게 달려가 두 팔을 벌려 나무를 감싸 안았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나무 밑에서 휴식을 취하는 샤키라와 인사를 하고 저 멀리 보이는 또 다른 순례자를 향해 걸어간다.


두 번째 만남은 정정한 어르신 순례자이다. 독일에서 온 분이셨는데 나이가 65세이다. 최소 열 살은 젊어 보이는 모습에 비결이 뭐냐고 여쭤보니 운동을 꾸준히 한다고 대답해 주셨다. 원래 직업은 의사인데 현재는 그만두고 아내와 같이 노후를 편안하게 즐기는 중이고, 평소에 백패킹을 좋아해서 스위스 알프스 쪽을 자주 놀러 간다고 하셨다. 나보다 조금 나이 많은 아들이 최근에 남아메리카로 떠나서 좀 허전한 마음에 산티아고를 다시 찾았는데, 이번에 세번째셨다. 걱정되지 않냐고 물어봤는데, 사실이지만 아들의 인생은 본인이 뭐라 할 수 없다며 그냥 묵묵히 응원할 뿐이라고 하셨다. 자식이 하고 싶은 것을 지원해 주는 게 부모의 역할이라고 이야기해 주셨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여유가 몸에 묻어 나오는 분이었다. 저렇게 늙어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마을에 도착했다. 화장실을 찾는 어르신과 인사를 하고 저 멀리 보이는 두 순례자를 향해 걸어간다.


세 번째 만남은 한국인 부부 순례자이다. 신혼여행으로 산티아고를 걷는 낭만이 넘치는 분들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선해 보이는 느낌이 확 오는 사람들이 있다. 두 부부의 모습이 정확히 그러했다. 둘은 현재 이탈리에 베네치아에서 함께 가이드를 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남자분께 어쩌다가 해외에 살게 되었는지 경위를 물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 앞으로 인생에 대해 방황하는 시기가 있었는데, 가이드를 해보고 싶어서 무작정 베네치아로 넘어갔다고 했다. 워낙 관광으로 유명한 도시라, 타국 사람들도 관광업을 할 수 있도록 학위를 제공해 주는 학교가 있었고 거기에 입학하면서 지금의 와이프를 만났다고 했다. 사실 코로나 시기에 너무 힘들어서 중간에 귀국할까도 고민을 많이 했지만, '1년만 더, 1년만 더 버텨보자'라는 마음가짐으로 살다 보니 어느새 벌써 10년이 다되었다고 말해주었다.


베네치아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카리온에 도착 버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걸었다. 벌써 도착했다니, 아쉬운 마음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고질적으로 아팠던 왼쪽 어깨도 오늘만큼은 아무런 통증이 없다. 와이프분께서 오늘 점심을 같이 먹자고 제안해 주셨다. 당연히 괜찮다고 대답하며 오늘 숙소에 먼저 도착한 부산 친구가 있는데 함께 먹어도 되냐고 여쭤보았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숙소에서 짐정리를 하고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약속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부산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전 토레스 델리오에서 우연히 만났던 순간보다 더욱 반가웠다.


"무릎은 어때?"

"내리막길이 진짜 힘들긴 한데, 메세타 평원은 쭉 평지니까 괜찮지 않을까?"

"길이 확실히 업다운이 없기는 해. 내일부터는 세상 누구보다 천천히 걷자."

"다시 걸을 생각에 몸이 근질근질하네."


부산 친구와 먼저 식당에 가서 자리를 잡고 기다리자, 곧이어 가이드 부부도 도착했다. 친구가 예전에 유럽 여행을 할 때 베네치아에 가본 적이 있어서 그런지 가이드 부부와 꽤 빨리 친해졌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음식을 시켰고, 나는 그렇게 뽈뽀라는 음식을 처음 맛보게 되었다. 삶은 문어에다가 올리브 오일, 파프리카 가루, 소금이 뿌려져 있었다. 난생처음 맛보는 부드러움이었다. 과장을 조금 더 보태서 입안에서 스르르 녹아서 사라졌다. 우리나라에서는 문어를 탱탱하고 쫄깃하게 먹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여기는 정반대의 식감이었다. 취향의 차이기에 무엇이 더 낫다고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스페인 문어는 꽤나 매력적이었고 나는 자연스레 한 그릇을 더 주문했다.


점심을 먹고 커피 한 잔을 마신 후, 부부와 길에서 또 만날 날을 기약하며 부엔 까미노라는 말과 함께 헤어졌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큰 마트인 디아(Dia)가 있어서 이것저것 장을 봤다. 숙소에 돌아왔더니 마침 대구 동생도 있었다. 오랜만에 셋이 모인 날을 기념하며 동생이 저녁으로 닭곰탕을 만들어주었다. 목이 칼칼했던 나에게 적절한 음식이었다. 우리 셋은 그렇게 따뜻한 저녁을 먹은 후, 마침 주방에 있던 카드로 여러 가지 게임을 하며 시끌벅적하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오늘 하루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삶은 굉장히 다채로운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한국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주위에 나와 비슷한 사람들밖에 만나볼 수 없었는데, 순례길 위에는 나와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의 모습으로 살기까지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겁다. 시간이 지날수록 보다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세상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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