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러운 하루와 한 그루의 나무

[15일 차]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 > 테라딜로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

by Zorba

[Day 15] Carrion de los Condes > Terradillos de los Templarios


붉게 물든 하늘 아래를 걸으며 서서히 카리온을 떠난다. 어제 저녁 대구 동생이 만들어준 닭곰탕 덕분이지 어제보다 좋아진 컨디션으로 가볍게 하루를 시작한다. 어느덧 생장을 출발한 이래 두 번의 일주일을 돌아 세 번째 금요일을 맞이한다. 그 시간은 홀로 사유하는 날들과 누군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날들로 꼼꼼히 채워졌다. 다만 그러한 시간이 서서히 흘러감에 따라 생각할 거리도 이야깃거리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예전에 대구 동생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첫 열흘은 몸의 카미노, 다음 열흘은 정신의 카미노, 마지막 열흘은 영혼의 카미노.' 정신의 길에 반정도 다다른 이 시점에서 나는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의 메세타 평원은 광활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오늘은 메세타 평원은 같은 풍경이 끝없이 반복되는 다소 지루한 길로 변해있다. 지금까지 걸었던 그 어떤 코스보다 난이도는 쉽지만 정신적으로 힘들어진다. 예전에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렌터카를 빌려 요세미티 공원까지 운전했던 시절이 문득 떠오른다. 아무리 달려도 변하지 않는 풍경 사이로 내비게이션 안내 음성이 들려온다. '400KM 앞 우회전입니다.'


'왜 걷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 찼던 나는 사라지고, 관성적으로 '그냥 걷는' 내가 남아있다. 순례길 시작할 때부터 찌릿했던 왼쪽 어깨의 통증이 오늘따라 심해진다. 더 이상 걷지 못할 정도여서 길 위에 그냥 앉아버린다. 그동안 굳이 가지고 다니던 물건들을 죄다 꺼내서 버린다. 드디어 아집을 내려놓는 순간이다. 이제 더 이상 이 모든 걸 짊어지고 갈 긍정적인 힘이 남아있지 않다. 내일은 다를 수 있겠지만 적어도 오늘은 아니다. 체감상 2kg 정도를 덜어낸 것 같다.


가방을 다시 멨을 때 약간 가벼워진 것을 체감할 수 있었지만, 1시간도 채 걷지 않아 왼쪽 어깨가 다시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게 때문은 아니다. 버리지 말걸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 언젠가 비워내었으리라 애써 위안한다. 그저 오늘 목적지인 테라딜로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Terradillos de los Templarios)까지 어떻게든 걸어간다는 생각으로 어깨를 부여잡고 걷는다. 오늘따라 마을 이름도 뭐 이리 긴지 입에 잘 들러붙지도 않는다.


그간의 순례길은 아무리 힘들어도 즐거운 순간이 한 번이라도 함께했는데, 오늘은 그저 고통의 연속이다. 처음으로 길이 재미없고, 심지어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든다. 땅만 바라보며 한숨을 푹푹 쉬다가 애써 고개를 들어보면 황무지 사이로 굳게 자라는 나무가 한 그루씩 듬성듬성 보인다. 외롭고 쓸쓸해 보이지만, 꿋꿋이 자라나서 풍성한 잎을 피워냈다. 그 나무를 보며 굳건히, 묵묵히 걸어가 보기로 한다. 인내의 미덕을 가져본다. 평소보다 자주 그리고 오래 쉰다. 늘어질수록 길이 힘들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오늘은 어쩔 수가 없다.


알베르게에 늦은 시간에 도착한다. 다른 순례자들은 모두 숙소에서 이미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 그저 오늘 하루도 무사히 잘 걸었다는 사실에 의미를 둔다. 내일도 같이 날이 반복될 수 있겠지만, 그 역시 이겨내야 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메세타 평원은 나에게 인내와 끈기의 미덕을 알려주고 있는 듯하다. 삶은 언제나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을 수 없다. 대신 지루하고 평범한 나날들이 삶의 대부분을 이룬다. 이러한 순간들을 견뎌내고 묵묵히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내리막길도 나오지 않을까. 오늘 아무 생각없이 끝없는 평원을 걷느라 피곤한 나머지 일찍 잠을 청하며 내일 마주할 또 다른 지루함을 대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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