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차] 테라딜로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 > 베르시아노스
[Day 16] Terradillos de los Templarios > Bercianos del Real Camino
어김없이 붉게 물든 하늘을 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생장에서 산티아고까지 우리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걸어가게 되어있다. 그렇기에 매일 이른 새벽에 출발하다 보면 어느새 등 뒤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직은 깜깜한 어둠을 헤쳐나가다 보면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천천히 햇살을 업고 드러난다. 이 길의 끝에서 나는 무엇을 얻을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나에게 아직 가야 할 길이 있고, 나는 그저 그 길을 충실히 걸어 나갈 뿐이다.
쌀쌀해진 날씨에 거리의 나무들은 서서히 겨울을 준비하는 듯 가까스로 품고 있던 낙엽들을 살포시 길가로 내려놓는다. 굳이 그 낙엽을 하나씩 정성스레 밟으며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낸다. 어린 시절의 습관을 반복하며 지루할 법한 순례길에 약간의 재미를 찾아본다. 걷다 보면 그리 반갑지 않은 거미줄에 걸리기도 하고, 얼굴에 붙는 날파리들을 쫓아내려 손을 허공으로 휘젓기도 한다. 길에 푸르름이 점점 사라지며 생명을 잃어가는 듯하지만, 그래도 나름의 황량함도 나쁘진 않다. 걸으면서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지금 시기에만 경험할 수 있는 산티아고의 또 다른 매력이 아닐까 싶다.
신기하게도 카미노는 적재적소에 쉬어갈 벤치가 있다. 한 시간 정도를 걸으면 고질적인 어깨 통증이 찾아오곤 한다. 대략 4~5km를 쉬지 않고 걸은 시점인데, 항상 그즈음 앉아갈 쉼터가 발견된다. 슬슬 어깨가 아프다고 그만 가라고 소리치는 딱 그 순간, '내가 여기 있으니. 쉬어가시오.' 하고 벤치가 기적처럼 찾아온다.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벤치에 앉아 당충전을 하면, 그다음 한 시간을 걸어갈 힘이 생긴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는 이처럼 길을 걷다가 편하게 앉아 쉴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한 듯하다. 우리는 그렇기에 카페라는 공간에 굳이 들어가서 대화를 나누곤 한다. 물론 강이나 산 근처에는 산책을 하면서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지만, 강남 한복판에서는 찾기 힘들다. 카페 이외에는 선택지가 없기에, 어떤 날은 커피만 세네 잔씩 마시기도 한다. 길가에 벤치가 조금 더 많아지고 사람들이 야외에서 편히 앉아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많이 생기기를 내심 바라본다.
무릎이 서서히 회복 중인 부산 친구에 발걸음에 맞춰서 천천히 걷는 요즘이다. 점점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오랜만에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이가 먹어갈수록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게 어려워져 가는 시기에 어떻게 보면 축복이라고까지 느껴진다. 우리는 이 지루한 길 위에서 서로가 살아온 이야기를 나눈다.
서울과 부산. 문과와 이과. 나이는 같지만 살아온 환경이 너무나도 다르기에, 각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전혀 다른 세상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듯하다. 우리는 서로의 세상을 되도록 서로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해 준다. 내가 대학교 졸업 후 살아왔던 '광고'라는 세상을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이야기해주다 보니, 친구도 서서히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고, 나는 거기에 또 신나서 이리저리 떠들었다. 한 시간을 쉴 새 없이 얘기했던 것 같다. 회사 입사 초기에 느꼈던 일에 대한 열정이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어쩌면 그동안 내 일을 너무 싫어하고 있지만은 않았나 되돌아보게 되었다. 일을 그저 돈벌이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고민해 보았다.
광고란 서비스나 상품에 날개를 달아주는 일이다. 아무리 좋은 서비스나 상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홍보가 잘 되지 않는다면 세상에 알려질 수가 없다. 좋은 마케팅은 좋은 서비스나 상품을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용자에게 적절하게 전달해 주는 일이다. 광고는 그저 플랫폼이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것의 본질은 결국 광고주의 성과를 극대화시키고 이용자에게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는 일이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내가 했던 일 역시 어느 정도의 가치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새 사하군(Sahagun)이라는 마을에 도착한다. 생장에서 출발한 산티아고 순례길에 딱 절반에 위치한 곳이다. 마을의 입구가 보이자 '와 이제 절반 왔네.'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동시에 300km 대로 접어든 표지판을 보면서 약간의 아쉬움도 밀려왔다. 이제 내가 걸어야 할 길이 어느새 절반도 안 남았다는 것과도 같으니까. 절반의 순례를 기념이라도 하듯 오랜만에 따스한 햇살이 마을을 포근하게 감싼다. 마을 곳곳을 둘러보며 여유를 즐기다가 구수한 쿠키 냄새에 이끌려 충동구매도 해본다. 저 멀리 보이는 사하군의 큰 문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다음 절반도 잘 부탁해 본다.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 (Bercianos Del Real Camino)로 가는 길에 덩치 큰 스코틀랜드 순례자 케빈을 발견한다. 위스키를 주제로 대화를 시작하다가 어느새 축구 이야기까지 번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우리는 앞에 보이는 벤치에서 잠깐 쉰다. 케빈이 잠시 기다려보라고 하면서 인스탁스와 같은 즉석 인화 카메라를 꺼낸다. 그리고 길에 서있는 우리의 모습을 찍고 그 자리에서 인화된 사진을 건네준다. 그제야 생각났다. 케빈은 우리가 산타 도밍고의 알베르게에서 만난 적이 있던 친구였다. 그 당시 우리가 아침 일찍 알베르게를 떠나기 전 비몽사몽한 상태로 사진을 찍혔던 경험이 있는데, 장소만 다르지 지금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케빈은 아마 기억을 못 하는 듯하다. 지난번에 찍은 사진은 내가 지갑에 고이 모셔두고 있기에, 이번에 찍은 사진은 부산 친구가 가져가기로 한다. 즉석 인화 카메라 덕에 사소한 추억이 생겨버렸다.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쉽고 간편한 방법이다. 혹여나 다음에 순례길을 오게 된다면, 나도 누군가에게 추억을 선물할 수 있는 무언가를 들고 오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베르시아노스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길에서 종종 마주치던 독일인 커플을 발견한다. 갑자기 남자애가 나한테 깜짝 놀란 표정으로 달려와서 말을 건다.
'내가 3년 전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왔는데, 거기 길에서 만난 어떤 아저씨를 방금 알베르게에서 만났어. 너무 신기하지 않아?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지? 얼굴을 보니까 딱 생각나더라고. 산티아고는 참 특별한 곳이야.'
혹여나 다음에 순례길을 오게 된다면, 나는 이번에 길에서 만난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상상만 해도 가슴 벅찬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