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차] 에스테야 > 토레스 델 리오
[Day 5] Estella > Torres Del Rio
새벽에 알베르게를 나오자마자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별을 뜻하는 마을인 에스테야였기에 나름 기대를 했지만, 이내 고개를 떨궜다. 별은 어디로 숨었는지 그저 까마득한 어둠으로 덮인 하늘일 뿐이었다. 평소와 같은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었다. 마을을 지나면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지는 그림도 이제 익숙하다. 산티아고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몸은 그래도 이 순례길의 리듬에 적응한 듯하다.
걷다 보니 어느새 이라체 수도원이다. 전날 알베르게에서 같이 묵은 동생이 와인 정수기가 있다고 한 곳이다. 반신반의하며 수도꼭지를 오른쪽으로 돌려보니 붉은색의 와인이 쏟아져 나온다. 지금 걷고 있는 라 리오하(La Rioja) 지방은 스페인의 유명한 와인 산지이다. 11월이라 그런지 길가의 포도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지만, 흘러넘치는 와인 정수기를 보고 있자니 리오하 지방에 와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누구나 대학교에 처음 입학하면 매일같이 술자리를 경험하게 된다. 나 역시도 그러했다. 다만 그 술자리가 나를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소주 한 잔만 마셔도 시뻘겋게 변하는 피부까진 버틸만했다. 한 병 정도 마셨을 때는 메스꺼운 속을 붙잡고 화장실로 달려가 오늘 먹은 모든 음식을 게워내기를 반복했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술을 마셔야 하나?" 친구들은 술을 어느 정도 마셨을 때 알딸딸한 기분이 좋다고 했다. 나는 그 기분을 느끼기도 전에 화장실로 달려갔다. 신입생 시절 술과의 사투를 벌인 끝에 패배를 선언했다. 그 패배에 굴복하고 수년간 피치 못한 상황이 아니면 술을 거의 입에 대지도 않았다.
20대의 끝자락에서 신기하게도 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평소에 맛있는 음식을 찾으러 다니는 걸 즐겼던 나는 한식을 특히나 좋아했다. 자연스레 음식을 먹을 때 몇 번 소주를 같이 먹게 되었다. 과하지 않게 적당히 원하는 만큼만 마시니, 술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졌다. 오히려 좋은 음식과 같이 먹는 술이 주는 즐거움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었다. (물론 음식과 술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함께하는 사람이지만 말이다.) 여전히 잘 마시지는 못해서 누군가에게 선뜻 술 마시자는 제안을 하지는 않지만, 이제는 굳이 술자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술이 주는 즐거움을 뒤늦게 알았던지라 다양한 술을 맛보지 못했다. 사실 나에게 술이란 소주, 맥주, 막걸리가 전부였다. 와인에 대해 문외한인 나에게 와인 정수기는 신선한 충격이다. 한국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와인은 비싼 술이라는 인식이 강했는데, 이곳에서는 수도꼭지만 틀면 와인이 흘러나온다. 엊그제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먹었던 순례자 메뉴가 생각난다. 와인 한 잔을 무료로 제공하길래 스페인 사람들은 참 인심이 후하다 생각했는데, 여긴 와인이라는 술 자체가 굉장히 흔해서 그 가격이 저렴한 것뿐이었다. 문득 스페인까지 왔는데 와인을 안 마시는 건 손해인 것 같았다. 무엇보다 와인이 주는 새로운 경험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느낄 미식의 즐거움을 한층 더 끌어올려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앞에 순례자는 빈 페트병에 와인을 한가득 담아간다. 나는 어린 시절 체육시간이 끝난 후 식수대에서 그렀던 것처럼 허리를 굽히고 두 손을 수도꼭지 아래에 받친 다음, 조그맣게 만들어진 웅덩이에 입을 갖다 대고 와인 맛을 본다. 가뜩이나 술이 안 받는 체질이어서 더 마셨다간 비틀거리며 순례길을 걸을 것이 뻔했기에 나름의 자제를 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처럼 물병에 와인을 담아갈 만큼 술에 열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덤덤하게 와인 정수기를 지나쳤다. 나중에 술이 삶에 작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는 취미가 된다면 오늘 보았던 와인 정수기는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을 것 같다.
다소 지루한 길을 걷고 있던 중 오른쪽에 양 떼를 목격했다. 이렇게 많은 양들을 이토록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 뒤로 양치기 소년이 강아지와 함께 등장했다. 이 신기한 풍경에 흠뻑 빠져들어 잠시 가방을 내려놓고 멈춰 섰다. 양들은 정신없이 풀을 뜯고 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강아지가 갑자기 앞으로 튀어나와 양 떼들의 진열을 가다듬는다. 그렇게 양들은 질서 있게 강아지를 따라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소년은 맨뒤에서 양 떼들을 따라간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양치기 소년은 거짓말쟁이지만, 실제로 보니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성경을 읽다 보면 양과 목자에 대한 비유가 참 많이 나오는데 물론 신앙적으로 중요한 이유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 시기에 그 지역에는 양치기가 꽤나 대중적인 직업이었기 때문에 적합한 메타포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본다.
오늘의 순례길은 거의 평지로만 이루어져 걷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지만, 강하게 내리쬐는 해와 맞서 싸워 야했다. 반팔만 남겨두고 겉옷은 전부 가방으로 집어넣었다. 생전 안 쓰던 정글모도 쓰고 선크림을 덕지덕지 발랐다. 땀이 흘러내릴 즈음 토레스 델 리오(Torres Del Rio)에 도착했다. 정식 루트에서 조금은 벗어난 마을이라 혹여나 숙소가 없을까 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알베르게가 하나 있었다. 자리 배정을 받고 방으로 들어가니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팜플로나에서 만난 부산 친구였다.
각자 걸음의 속도가 다르기 때문에 순례길에서는 자주 만나는 사람도 있지만 다시는 못 보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지금 같이 걷는 이 사람을 앞으로 못 볼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걷다 보니 누군가를 오랜만에 만나게 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이 사람을 한 번 더 만나게 된 것에 감사하게 된다. 나에게는 부산 친구가 딱 그러했다. 그 친구의 표정을 보니 역시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본다. 한동안 같이 걷지 않았지만, 우리는 '재회'라는 단어 아래 전보다 깊은 우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토레스 델 리오 마을에는 문을 연 식당이 없었기 때문에 알베르게 2층에서 저녁을 먹었다. 같은 알베르게에서 묵는 순례자 6명이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책상 위에 놓인 리오하 와인 한 병이 괜히 반가웠다.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우리들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저녁 시간을 함께 보냈다. 식당에서 제공되는 순례자 메뉴는 코스가 정해져 있는 듯하다. 바게트를 식전빵으로 시작하고, 보통 3코스로 진행된다. 샐러드/파스타로 구성된 애피타이저, 돼지고기/소고기/생선으로 구성된 메인요리, 마지막으로 디저트이다. 파스타는 생각보다 양이 많고 메인요리에는 항상 조그마한 파프리카 두 조각이 올라간다. 순례자 친구들한테 도대체 파프리카는 왜 주는지 모르겠다면서 투덜대자, 한 스위스 친구가 대답해 주었다. "여기서는 그게 가니쉬야." 할 말을 잃었다.
식사를 마친 후, 흡연을 하기 위해 잠시 밖으로 나간다. 팜플로나에서 만났던 강아지와 함께 순례하는 슬로바키아 친구 에릭도 함께했다. 에릭은 키가 훤칠하며, 항상 검은색 비니를 쓰고 있고 양쪽 다리에는 문신이 있다. 수염은 덥수룩하게 났지만 지저분하진 않고 큰 귀걸이를 끼고 있다. 가끔 살아가다 보면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특히나 첫인상이 강렬하여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 에릭이 나에게 정확히 그런 사람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혼자만 다른 아우라를 풍기는 친구였다. '멋있다'라는 표현이 가장 어울렸다.
밖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단 둘이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에릭의 직업은 석공이었다. 살면서 처음 들어보는 직업이었다. 그는 이내 알베르게 주변에 돌로 만들어진 집들을 가리키며 본인은 저런 건축물들을 수리하는 일을 주로 한다고 말해주었다. 본인 일에 굉장한 자부심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내가 만든 건축물이 그 자리에 그대로 문제없이 잘 보존되어 있는 모습을 볼 때면 표현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껴.'
에릭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점점 빠져들어갔다. 그는 확실히 내가 느끼기에 멋있는 사람이었다. 살면서 많이 만나볼 수 없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경험적으로 이런 유형의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만의 확고한 세계가 있다. 또 본인이 하는 일에 누구보다 자신감이 있고 그것에 몰두해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다. 내적으로 단단하기 때문에 이들이 내뱉는 말은 설득력이 있고, 외적으로도 본인에 대한 인지가 완벽하기 때문에 본인만의 스타일로 사람들과 전혀 다른 분위기를 준다. 나는 그것을 '개성'이라 부르기로 했다. 이들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알베르게에 돌아와서 유튜브를 보는데 우연히 알고리즘에 지디가 나온다. 긴 공백기 끝에 돌아온 지디는 서른 중반의 나이에도 여전히 멋있다. 오랜만에 내가 동경하는 모습의 사람들을 보니 밤이 깊어만 간다. 그 밤은 새로운 자극으로 물들어 있다. 침대에 누워서 곰곰이 생각해 본다. 멋있고 개성 있는 건 둘째치고 나는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가? 순례길에서 걸으면서 할 또 하나의 숙제가 생겼다. 나 자신에 대해 온전하게 알게 되는 순간 나 역시도 남들과는 차별화되는 개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열어본다. 나도 어느새 자연스레 남들 눈에 멋있어 보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