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송이 타파스와 기부제 알베르게

[6일 차] 토레스 델 리오 > 로그로뇨

by Zorba

[Day 6] Torres Del Rio > Logrono


로그로뇨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볍다. 팜플로나를 제대로 즐기지 못한 탓인지 대도시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생각에 벌써부터 설렌다. 사실 하루 일상이 '걷기'와 '먹기' 뿐이기에, 그 둘의 균형을 잘 맞춰주어야 한다. 열심히 걷기 위해선 맛있는 것을 먹어야 하며,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선 열심히 걸어야 한다. 어느 한쪽이 무너지는 순간 불완전한 하루가 되어버린다. 걸으면서도 입맛을 다시던 중 뒤따라오던 부산 친구가 어깨를 툭툭 친다. 떠나온 토레스 델 리오 뒤편으로 해가 차오른다. 따뜻한 햇살을 등에 업으니 걸치고 있던 옷을 한두 겹 벗게 된다.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순례길에 집중하고 싶어서 비행기에 오르기 전 가지고 있던 자산을 모두 매도하였는데, 예상대로 시장이 뜨겁게 상승한다. '이제라도 다시 사야 하나?' 마음이 조급해진다. 그래도 이 길에 집중하자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로 한다. 좋게 생각하면 끈기와 인내를 배우는 과정 중 하나일 수도 있다. 핸드폰을 다시 집어넣고 가야 할 길을 걸어간다. 햇살이라도 따뜻해서 다행이다.


비아나(Viana)라는 소박하게 이쁜 마을에 도착한다. 따뜻한 카페 콘 레체(Cafe Con Leche) 한 잔 마시며 잠시 쉬어 가기로 한다. 스페인어로 직역하자면 우유가 들어간 커피이다. (Cafe = Coffee, Con= With, Leche = Milk). 카페라테와 비슷한데 우유의 함량이 조금 더 적은 듯하다.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카페라테가 더 입맛에 맞는 듯하다. 그래도 카페 콘 레체가 스페인들이 일반적으로 마시는 커피라고 하니, 이 나라의 문화를 따르기로 한다.


커피를 마시고 나와보니 돌담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하는 백발의 어르신 두 분을 발견한다. 그 모습이 좋아 보여 나도 모르게 사진을 한 장 찍는다. 나이가 들어서도 동네에 일상을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좋은 삶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서서히 멀어지는 고등학교 친구들을 보며 우정 역시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과거의 이야기를 하면서 지난날들을 추억하는 것만으로는 오래 그리고 자주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이제는 성향이나 취미가 비슷하거나 미래를 함께 꿈꿀 수 있는 친구들만 점점 주변에 남는 듯하다. 이 친구들 역시도 얼마나 오래 곁에 있을지 모르겠다. 친한 친구 5명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듯하다. 나는 주변 친구들이 보기에 어떤 사람일까. 그들에게 나는 '오래 보고 싶은' 사람일까. 문득 사촌형이 나에게 해주었던 말이 생각난다.


"넌 이기적이진 않은데, 그렇다고 이타적인 건 아니야. 개인적이라는 표현이 젤 적당하겠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형한테 그런 얘기를 들으니 촌철살인이 따로 없었다. 앞만 보고 살아오느라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항상 내 위주로만 생각했고, 뭐든지 '나 자신'이 1순위인 삶을 살아왔다. 돌이켜보니 떠나보낸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문득 두려워졌다. 내게 남아있는 소중한 사람들 역시 언젠가는 나를 떠날 수 있지 않을까? 성향이란 쉽게 바꿀 수 없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천천히 할 수 있는 것부터 해 나아가야한다. 인색하게 굴지 않기. 말을 내뱉을 전 다시 한번 생각하기. 조그맣게나마 마음 표현하기. 돌담의 어르신들은 저 아래 어린 순례자가 자아성찰의 시간을 가지건 말건 서로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고 계신다.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떠난다.


예상대로 12시가 되기 전에 로그로뇨에 도착했다. 타파스 거리에 들어서자 저 멀리 스페인 아주머니들이 모여있는 가게가 보인다. 현지인 맛집은 실패할 수가 없다. 바 엔젤(Bar Angel)이라는 가게로 들어가니 철판 위로 양송이들이 기름과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부산 친구와 나는 양송이 타파스와 레몬 맥주를 주문했다. 워낙 유명한지라 우선 시키고 봤는데 먹기 직전까지 맛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다. 그러나 첫 입을 베어무는 순간 잠시나마 의심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도대체 양송이에 어떤 마법을 부렸길래 이러한 맛이 나는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과장 조금 보태서 유럽 여행하면서 맛본 음식들 중 단연 최고였다. 바게트 빵, 양송이 3개, 그리고 손톱만 한 새우로 이런 맛을 낼 수 있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하나 더 주문했다. 함께 먹는 레몬 맥주 역시 술을 잘 못 마시는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음료였다. 오늘의 피로가 싹 녹아내리는 듯하다. 더욱 놀라운 건 인당 5유로도 안 하는 엄청난 가격이다. 앞으로 순례길을 걸으면서 종종 생각날 맛이다. 괜히 입맛만 높아져서 스페인에서의 남은 식사들이 걱정된다. 무엇을 먹던 오늘의 양송이 타파스를 넘지 못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오늘의 알베르게는 기부제로 운영되는 곳이다. 우리는 오픈 시간인 2시에 맞춰서 입장했고, 관리자 할아버지가 유쾌한 농담과 함께 안내해 주었다. 알베르게 내의 모든 것은 무료이며, 저녁과 아침식사까지 제공된다. 순례자들은 떠나기 전 2층의 상자함에 본인이 원하는 금액만큼만 기부하면 되는 시스템이다. 생각지 못한 호의에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면서도, 얼마를 기부해야 마음이 편안할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침대 자리를 배정받고 우선 정비를 한다.


로그로뇨에 일찍 도착했기에 시간이 꽤 많이 남는다. 시내를 한 바퀴 둘러보다가 공원 벤치에 걸터앉아 주위를 살핀다. 러닝을 하는 부부도 보이고, 산책하는 대가족도 보이며, 지팡이에 두 손을 올리고 벤치에 앉아 있는 할머니도 보인다. 문득 삶의 방향은 여러 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너무 정해진 삶을 치열하게 살지는 않았는가 고민해 본다. 저기 보이는 강아지처럼 당분간은 의미 없이 제자리만 빙글빙글 뛰어다녀도 괜찮지 않을까? 무엇을 꼭 해야 만한다는 강박증은 잠시 내려놓고, 순례길 자체를 즐기기로 해본다.


저녁 7시에 성당에서 순례자 미사가 열린다고 하여 맨 뒷자리에 조용하게 앉는다. 우측 맨 앞 세줄에 청년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기타 반주에 맞춰 열심히 성가를 부르고 있다. 신부님은 스페인어로 미사를 집견하시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으니 집중력이 점차 흐려져 간다. 다소 산만한 태도로 주위를 둘러보니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구석구석 자리를 채우고 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서로에게 미소를 보낸다. 이 중에는 천주교 신자들도 꽤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사가 끝난 후, 성당을 둘러보다가 밖에 나와 순례자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강아지와 함께 순례하는 에릭은 로그로뇨에서 하루 더 묵는다고 한다.


'앞으로 다시 못 볼 수도 있겠구나.' 내가 앞으로 하루를 더 쉬지 않는 이상 에릭을 다시 만나긴 어려워 보인다. 어제 대화를 나누며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갑작스레 헤어져야 한다니 괜히 마음이 시큰해진다. 우리는 서로의 앞날을 응원하며 포옹으로 작별 인사를 한다. '부엔 까미노.' 아쉬움이 많이 남는지 괜히 한 번 더 뒤를 돌아본다.


알베르게의 2층에서는 저녁 식사가 무료로 제공된다. 오늘 이곳에서 묵는 순례자들은 모두 한 테이블에 모여 앉아 같이 저녁 식사를 한다. 음식을 먹기 전 관리인 할아버지가 먼저 순례자 노래를 부르자고 제안하신다. "Ultreia et Suseia". 라틴어인 울트레이아(Ultreia)는 '앞으로 계속 나아가자'라는 뜻이며, 수세 이아(Suseia)는 '더 높이 올라가자'는 뜻이다. 그 뒤에 다른 라틴어들은 생각이 잘 안 나는데, 이 두 단어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나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천천히 앞으로. 그리고 더 높이.


모두 힘차게 순례자 노래를 부르고 저녁을 먹는다. 음식의 맛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여기 기부제 알베르게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경험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식사를 마친 후, 자진에서 설거지를 하기로 했다. 여기 사람들이 베푸는 마음씨에 대한 나름의 대답이었다. 주방을 정리하고 나와서 기부함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지금까지 묵었던 어떤 알베르게 보다 많은 돈을 기부하고 계단을 내려간다. 대가 없는 친절에 대한 내 마음의 크기 기었다. 동시에 '기부'라는 행위에 대해 새로운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 기부 시스템이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해선 내가 누군가에게 마음의 빚을 져야 한다. 이것을 돌려주지 않고는 마음 한편이 계속 불편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기부를 하게 된다. 그리고 내 기부로 인해 그다음 사람도 이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하게 된다. 예전에는 '돈을 버는 것'과 '누군가를 돕는 것'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기부제 알베르게를 보면서 속으로 대단하다는 말을 연신 되풀이했다.


지난 몇 년간 여행을 참 많이 다닌 것 같다. 뉴욕, LA, 도쿄, 런던, 발리, 삿포로. 현실에 대한 도피였을까. 자유에 대한 갈망이었을까. 환상과 낭만에 대한 집착이었을까. 이유가 뭐가 되었건, 가보고 싶던 곳에서 해보고 싶던 것들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여행은 낯섦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라는 것. 나아가 좋은 여행이랑 수많은 낯섦 속에서 예기치 못한 즐거움을 찾는 행위라는 것. 맛집을 찾아갈 때 깨지지 않는 불변의 법칙이 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하물며 더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여행은 오죽하겠는가. 나 역시도 예전에는 시간단위로 계획을 짜면서 여행을 다녔는데, 이제는 이동수단, 숙소 정도만 예약해 놓는다. 계획이 있는 여행은 내가 생각한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무런 계획이 없는 상태에서 불쑥 찾아오는 즐거움은 그 깊이와 너비를 가늠할 수조차 없다. 애초에 기대가 제로에 수렴했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이러한 여행의 정점인 듯하다. 오늘 내가 어디까지 걷는지도 모르고, 어떤 음식을 먹을지도 모르고, 어떤 사람을 만날지도 모르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조차 모른다. 불확실성으로 물든 이 길에서 오는 사소한 행복조차도 그 어느 때보다 귀중하게 느껴진다. 점심에 먹었던 양송이 타파스가 그러했고, 지금 묵고 있는 이 기부제 알베르게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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