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차] 로그로뇨 > 나헤라
[Day 7] Logrono > Najera
알베르게의 아침은 여느 때와 다르게 분주하다. 모두가 잠에서 깨고 무언가에 홀린 듯 2층으로 올라간다. 무료로 제공되는 아침을 거스를 만큼 깊은 잠에 빠진 순례자는 없는 듯하다. 토스트기 앞에 한 사람씩 줄지어 본인의 식빵 한 조각이 바삭하게 구워지길 기다린다. 흡사 호텔 조식 뷔페에서 본 듯한 풍경이다. 토스트기의 인내심 테스트를 합격한 이들은 노릇하게 구워진 식빵을 들고 자리에 앉아 식탁에 놓은 여러 잼들 중 본인의 취향에 맞는 것을 선택한다. 식사를 마치고 짐을 챙겨 알베르게를 나선다. 앞으로 이런 알베르게를 볼 수 없을 것 같아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본다. 부디 이 알베르게가 꾸준히 운영되어 방문하는 모든 순례자에게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고 말해주었으면 한다.
순례길에 오른 지 일주일째다. 계산해 보니 느린 걸음으로 한 시간에 4km 정도를 걷는다. 평균적으로 25km 정도를 걷는다고 가정했을 때, 매일 6시간 정도를 꼬박 걷고 있다. 길을 지나면서 사람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제외하더라도 혼자 생각할 시간이 최소한 3시간 정도는 주어진다. 지난 일주일 동안 해당 시간을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는데 집중했다. 회사 휴직 기간인 6개월이라는 소중한 시간 안에서 어떻게든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 잡혔기 때문이었다. 부단히 애썼지만 실패했다. 낯선 땅에서 꼬박 한 주를 보낸 지금에서야 비로소 현실을 자각했다. 이 길을 걸으며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고 앞으로의 삶은 드라마틱하게 변하지 않는다. 애초에 산티아고는 도피처에 불과했다.
다행인 건 예전과 같이 절망감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나아가 굳이 특정한 '무언가'를 하려고 애쓰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저 하루하루 보람차게 살아가기로 한다. 그 하루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건, 나 자신이 보기에 부끄럽지 않으면 된다. 인생을 뒤바꾼 책 한 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은 수많은 책을 읽으며 서서히 변화하는 것이다.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순간 마법처럼 인생이 달라지진 않는다. 그럼에도 오늘 목적지인 나헤라(Najera)까지 최선을 다해 걷는다. 내일은 그다음 목적지까지 걷는다. 작은 발걸음이 모이다 보면 나는 이전과는 조금이라도 달라져 있을 것이다. 이 꾸준함 속에서 지루함과 나태함만 경계하면 된다.
한참 걷고 있는 중에 와인밭 근처에 덩그러니 멈춰있는 트랙터를 발견한다. 흙먼지가 쌓일 대로 쌓인 번호판에 빨간색의 선명한 글씨가 보인다. LOVE 38917. 살다 살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번호판을 본다. 문득 예전에 성가로 들었던 성경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코린토 1서 13장 4-7절)
자전거를 타고 순례하던 미국인 친구가 나를 앞질러 가는 것 같더니 이내 자전거에서 내려 발걸음을 맞춘다. 에스테야에서 처음 만난 트레스틴이라는 친구다. 중간중간 길에서 몇 번 마주치며 인사를 나누었지만 이렇게 같이 걷는 건 처음이다. 들어보니 순례길에 오르기 직전에 허리를 조금 다쳐서 배낭을 메고 걷는 건 무리가 있어 자전거를 타고 순례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자전거는 팜플로나에서 렌트했고, 산티아고에 반납하게 된다. 뒷바퀴 양옆에 배낭이 각각 달려있어 그곳에 짐을 싣고 다니는 듯했다.
트레스틴은 독일 아버지와 헝가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쪽 부모님은 국적을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다. 결혼은 두 가족의 결합을 약속하는 의식이라고 했던가. 어렵게 결혼에 성공했음에도 서로 다른 나라의 두 가족은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했다. 심해지는 갈등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트레스틴의 가족은 미국으로 이주하게 됐다. 휴스턴에서 트레스틴의 아버지는 자동차 정비 일을 하시면서 생계를 이어나갔고, 트레스틴은 그렇게 미국 이민 2세가 되었다.
"난 뼛속까지 미국인인데, 신기하게도 유럽에만 오면 집에 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
트레스틴은 다른 미국인들처럼 미식추구, 야구, 농구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축구를 사랑하고 월드컵 기간만 되면 독일 국가대표팀을 응원했다. 나는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때 한국이 2:0으로 독일을 이겼던 걸 기억하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 살았던 지역을 연고지로 하는 축구팀인 레버쿠젠을 응원하고 있었으며, 맥주를 좋아했다.
예전에 아버지 회사 발령으로 중국에서 4년간 거주했던 경험이 있다. 그 당시 좋은 기회로 국제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본인이 태어난 나라보다 중국에서 더 오래 산 친구들도 많았다. 학교에서는 가끔 '제3 문화권 아이들(Third Culture Kid, TCK)'이라는 주제로 성장기의 상당 부분을 부모의 문화 밖에서 자란 우리들을 위해 세미나를 열었다. 언제는 세미나의 한 주제로 미국의 Melting Pot(용광로)와 Salad Bowl(샐러드 그릇)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Melting Pot은 용광로 속에서 여러 물질들이 용해되어 하나가 되듯,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하나로 융합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Salad Bowl은 그 반대로 여러 가지의 샐러드 재료들이 그릇 속에 형태 그대로 담기는 것처럼,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사회 속에서 유지하며 살아간다는 뜻을 담고 있다. 날씨가 쌀쌀하여 얼굴이 빨개진 트레스틴을 보며, 샐러드 그릇에 담긴 토마토가 생각난다.
오늘의 목적지인 나헤라(Najera)에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알베르게 체크인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던지라 끼니를 때울 식당을 살펴보다가 중국어 간판의 음식점을 발견했다. 트레스틴, 나, 부산 친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곳을 선택했다. 친구들은 나에게 중국에서 살다왔다는 이유로 메뉴 선정 전권을 위임했다. 주문 역시 중국어로 해야 한다는 미션까지 부여했다. 다행히 간단한 중국어는 몸이 기억하고 있어 성공적으로 볶음밥, 만두, 완탕면, 고기철판볶음을 주문했다. 10년 만에 중국어로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 보니 참 어색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쓸모를 찾은 것 같아 내심 뿌듯했다. 나를 바라보는 친구들의 시선이 달라진 게 느껴졌다. 어깨를 한 번 으쓱해 주었다.
다른 음식들은 그저 그랬지만, 볶음밥은 내가 중국에서 먹던 맛이랑 정확히 일치했다. 밥알이 한 알 한 알 기름에 코팅되어 살아있었고 간도 완벽했다. 그 자리에서 하나를 더 주문했다. 식사를 마치고 트레스틴이 오늘 점심은 본인이 사겠다고 했다. 미안한 마음에 밥을 얻어먹지는 않았지만, 마음씨가 참 고마웠다. 덕분에 몸과 마음이 모두 따뜻한 점심식사였다.
식사를 마치니 알베르게에 체크인할 시간이다. 정비를 마친 후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본다. 나헤라 마을 뒤편의 동산이 꽤나 웅장하다. 흙산처럼 보이는데 그 위로 듬성듬성 자라는 나무들이 보인다. 강 따라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도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알베르게에 돌아와서 사람들과 실컷 떠들다가 부산 친구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나간다.
Meson El Buen Yantar라는 음식점에 들어가서 순례자 메뉴를 시켰다. 종업원 아주머니께서 통 크게 리오하 와인 한 병을 테이블에 놓아주신다. 전식으로 리오하 감자와 소시지가 들어간 수프가 나온다. 한국에서 반찬으로 자주 먹던 감자조림과 비슷한 맛이다. 국물까지 긁어먹었다. 메인 메뉴로 양고기와 폭립이 나왔다. 단언컨대 지금까지 순례자 메뉴로 먹었던 고기들과 차원이 다르다. 뼈에 붙어있는 조그마한 살까지 뜯어먹었다. 후식으로는 푸딩이 나왔다. 어제 양송이 타파스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순례길을 걸은 이래 만족도가 가장 높았던 식사를 하니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술도 잘 못 마시면서 와인을 계속 마시다가 취했는지 아주머니에게 잘하지도 못하는 스페인어를 연발한다.
"Muchas Delicioso!"
나름대로 '매우 맛있다.'는 표현을 했는데 알아들으셨는지 모르겠다. 오늘 저녁 취기를 빌려 부산 친구와도 한 층 더 가까워진 듯하다. 평소에 하지 않았던 서로에 대한 조금은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알고 보니 생각보다 나와 비슷한 점이 더 많은 사람이었다. 앞으로 걸으면서 이야기할 시간은 충분하니 오늘은 이쯤 하기로 하고 각자 침대로 향한다.
취한 상태로 불 꺼진 알베르게에 천장을 바라보며 오늘 길을 걸으며 했던 생각들을 곱씹어본다. 인생을 철저한 계획 하에 완벽하게 살아가고자 했던 나를 이제야 내려놨다. 동시에 나는 불완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마주할 기대감으로 인생은 여전히 설레고 아름답다.